바나나 우유와 오예스의 새드 엔딩
거창한 이별 선언도, 무겁게 내려앉은 결별의 기운도 없었다. 그저 봄이 시작되는 어느 날처럼, 내 결심도 조용히 움틀거렸다. 아직 서른 넘은 아이처럼 풋풋하게 빛나던 겨울의 직장이, 어느새 햇볕에 익어가는 여름 정원처럼 무르익어갔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텃밭에 첫 모종을 심던 날, 손톱 밑으로 파고드는 흙의 감촉이 낯설었다. 도시의 부드러운 키보드감과는 전혀 다른, 거친 땅의 질감이 내 손을 더럽혔다. 한때는 깨끗하게 정돈된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휘저었는데, 이제는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아 끙끙대며 텃밭을 적시고 있었다.
"상추 좀 따오세요. 오늘 점심 쌈 쌀 거예요."
대리님의 말에 얼른 가위를 들고 나가 텃밭에서 초록빛 상추를 따왔다. 물기를 털어내고 영업사원들의 도시락 위에 곱게 올려놓았다. 자리로 돌아와 내 샐러드 위에도 갓 딴 상추를 얹어 먹었다. 잎맥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싱싱함이 거래처에서 사온 아보카도를 얹은 샐러드와 어우러져 입 안에서 퍼졌다. 강남 어느 비싼 샐러드 가게에서도 맛볼 수 없는 신선함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앎은, 마치 담요처럼 내 마음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내 비밀. 나는 곧 떠날 거라는.
"냉장고가 너무 더러우니, 청소 좀 하세요. 안에 쓸데 없는 것들도 좀 내다 버리고."
주임님의 카톡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걸 시킬 권한이 있는 사람은 대리님 정도였는데. 자기가 뭔데 나한테 명령을 해? 작은 분노가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과연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맨손으로 칸막이를 빼내는데, 누군가 쏟아 놓은 오래된 음료가 낀 자국이 끈적끈적하게 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집에서도 냉장고 청소를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나였지만, 문득 이 차가운 냉장고를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치 내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곳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처럼.
햇볕에 말린 칸막이들이 반짝였다. 다시 제자리에 넣고 깨끗해진 냉장고를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어쩌면 나는 이런 일에도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이직을 결심하던 날, 그 날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 때문이었는데.
"냉장고가 정말 깨끗해졌네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이틀 뒤, 주임님이 물어왔다. 어딘가 쑥스러운 듯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지난번에 사왔던 더치 원액은 어땠냐고 물었다.
"대리님이 맛있어했어요."
"먼주임님은 별로였어요?"
"저도 좋았어요."
"그럼 사올테니 라떼 한 잔 만들어줘요."
... 이 사람이 진짜 왜 이러지.
그래, 어차피 이것도 다 아물어 가는 과정이겠지. 그간 받아주지도 않던 정을 담아 해달라는 걸 하나하나 차곡차곡 해줬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고, 또 그토록 원했던 일이기도 했으니. 대리님은 옆에서 혀를 찼다.
"아니 그걸 뭐하러 들어줘요!! 언니 바보야? 진짜 답답해 죽겠네!"
한 달의 시간이 뜨거운 여름볕 아래서 나른하게 지나갔다. 내 마음에는 날마다 폭풍이 쳤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강낭콩이 여물고,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는 동안 내 마음도 익어갔다. 6월의 햇살 아래, 춥고 차갑기만 했던 사무실이 조금씩 볕을 머금고 느릿느릿, 한 장씩 마음속에 찍혔다.
마치 학생들이 모두 떠난 뒤 교실처럼 고요하고, 아릿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난 마음을 굳혔다.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떠나던 날.
한 명 한 명 인사를 하던 그 날. 울음을 겨우 참아가며 업무를 마치는데, 상무님도 여사장님도 나에게 다시 오면 되지 뭘 서운해하느냐고 했지만, 나는 알았다. 내 성향상, 이곳은 절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들의 연락도 다 차단하고 말 거라는 걸.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수많은 실수와 좌절의 순간들이, 이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이, 어떤 부자연스러운 인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야 깨달았기 때문일까. 보내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삼겹살 파티를 하자며 부르신 그 자리에서 난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때, 카톡으로 주임님이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매번 내가 좋아한다고 사다주던 단지 모양의 바나나 우유 이모티콘이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감사했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도 그에게 처음으로 주었던 오예스를 한 박스 보냈다. 꼭 혼자만 먹고 다른 사람 나눠주지 마시라고.
안녕인걸 알았지만
차마 안녕이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정말 안녕일 것 같아서.
이 카톡 대화가,
또 이어질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남겨두고 싶어서.
난 그렇게
끝의 끝까지도 바보였다.
계획에 없던 이별은 이루어졌다.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어디론가 떠나가야만 새로운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때때로 내 기억 속에서, 상추를 따던 손끝의 감각과 바나나 우유의 달달한 맛이 선명하게 피어오르곤 한다. 이별이 남긴 가장 달콤하고도 쓸쓸한 기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