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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자유

ENTJ는 백수가 되어도 ENTJ

by 먼지잼

퇴사 후 처음 맞이한 월요일 아침, 7시가 되자 어김없이 반려묘가 내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부리나케 뛰쳐나갔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고양이와 이불 속에서 뒹굴며 여유롭게 스마트폰을 켰다. 습관처럼 메일함을 열었다가 피식 웃었다. 더 이상 확인할 메일도, 대응해야 할 업무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된 24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엑셀을 켰다. 타임 테이블 시트에 일일 루틴을, 프로젝트 시트에는 창업 준비 일정을 정리했다. 회사에서는 누군가 정해준 시간표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만드는 나만의 시간표다. 체계적인 자유를 꿈꾸는 나의 모습이 ENTJ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계획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꼈다.


아침 루틴의 첫 번째는 카페 나들이. 집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일부러 밖으로 나섰다. 아무리 자유로운 시간이라도 하루종일 집에만 있다간 금세 무기력해질 것 같았다. 출근 시간에 여유롭게 카페 창가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유가 실감 났다. 카페에서 나와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이것도 내가 짠 루틴 중 하나다. 매일 아침 산책이나 등산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후에는 온라인 스토어 기획에 몰두했다. 지인들과 함께 시작할 브랜드를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고, 매일 콘텐츠도 올렸다. 브랜딩과 마케팅 공부를 위해 여기저기서 책과 강의를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일하면서 막연히 꿈꾸던 것들이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설레었다. 퇴직금이라는 든든한 지원군도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시기가 있을까?


저녁이면 회사 다닐 때는 미뤄뒀던 집안 정리를 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케아 홈페이지를 뒤적이며 인테리어 소품을 고르는 재미도 쏠쏠했다. 집이 바뀌는 만큼 나의 일상도 새롭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엑셀에 정리한 나의 자유 시간표는 완벽했다.
아침 산책, 브랜딩 공부,
콘텐츠 제작, 집 정리까지.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인생이란 것은 결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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