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엄마는 모르게
[에세이] 엄마의 보리차
회사 다니면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 ‘아침마다 도시락 싸오는 사람’이다. 그 바쁜데 하루 전날 혹은 아침 일찍부터 도시락을 싸서 챙겨오는 걸 상상해 보면, 부지런함이 엿보여 부럽기까지 하다. 매일 무언가를 챙겨서 어딘가로 가는 일, 나도 엄마의 손에 이끌려 6년 동안 해본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다니던 때, 매일 저녁에 우리 집에선 자주 고소한 냄새가 났다. 냄새의 근원은 큰 주전자에 담긴 보리차였다. 정수기가 있는 집이 흔하지 않았고, 물을 사 먹는다는 생각조차 낭비라고 생각할 때였기에 물을 끓여 마시는 것이 자연스럽던 때였다. 그렇게 우리집은 뜨거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예외 없이 매일 저녁 한 시간씩은 보리차를 끓이는 열기로 가득했다.
엄마는 두어 시간 동안 보리차를 펄펄 끓이고 베란다에서 한 김 식힌 후, 물통에 담아주셨다. 여름엔 냉동실에 보관하고, 겨울엔 엄마가 손수 뜨개질한 보온용 컵 홀더를 끼워 아침 등교를 같이 준비했다. 보리차가 담긴 물통은 한 개가 아니라 총 2개였다. 한 개는 내 거 , 한 개는 담임 선생님 거였다. 늘 교실에 1등으로 등교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교탁 위에 선생님 물통을 하나 두고, 자리에 돌아와 친구들을 기다렸다. 그땐 그 물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그저 나에겐 꽤 귀찮았을 뿐이었다. 아침마다 물 두통을 들고 학교에 가는 것도, 조금이라도 물통 틈이 열린 날엔 가방 안쪽이 흥건하게 젖는 것도, 덜렁대는 성격 탓에 가끔 물통을 학교에 두고 온 날엔 다시 학교에 가지러 가야 했던 것도. 그저 나에겐 심부름일 뿐이었다.
엄마는 첫째인 오빠에 비해 비교적 내게 신경을 못 쓰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게다가 직장 때문에 학부모들 모임에 자주 참석할 수 없다보니 흔한 치맛바람을 일으킬 기회도 없으셨다. 그때만 해도 그런 엄마들 몇몇이 매 학기 초, 봉투에 현금을 담아 선생님에게 드리는 것, 과일부터 떡이며 뭐며 온갖 선물을 드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사실상 우리 엄마는 봉투 대신 보리차를 담아주신 격이다.
이 현명한 촌지, 보리차를 받은 나의 담임 선생님들은 꽤나 좋아하셨다. "OO아 고마워, 엄마께 말씀 전해드려줘"라며 매일 인사를 건네주신 분도 계셨고, 다 드신 물통은 세척해서 돌려주신 분도 계셨다. 이따금씩 내가 물을 잊고 온 날엔, 은근히 아쉬워하시는 분도 계셨다.
보리차로 내가 조금 더 예쁨을 받았거나, 생활기록부에 칭찬 한마디가 더 적혀있었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점점 더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깊어진다. 영화 ‘선생 김봉투’, 아니 ‘선생 김봉두’의 촌지보다 더 중독적인 엄마의 보리차. 보리차 들고 학교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커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준비를 하고 있다.
엄마가 무언가를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 글쓴이 : 이가루(35/여/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