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엄마는 모르게
이사를 했다. 출퇴근 시간도 반절이나 줄었고, 공간도 넓어졌다. 덕분에 끼여서 지내던 몇 가지 가구들은 꽤나 숨통 트이게 자리했고, 그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침대나 테이블 등 새로운 가구도 맞이하게 됐다. '오늘의집'을 수십 번 들락날락 한끝에 주방 식탁 의자를 구매했다. DIY 로 시간과 손은 더 많이 가지만, 배송받을 때 내가 집에 없어도 되고, 무엇보다 가격이 완제품보다 저렴하기에 이 이상 가성비 좋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택배가 도착한 후, 육각렌치가 아닌 드라이버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의 작은 가구의 경우 육각렌치가 함께 들어가 있었으므로 드라이버는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의자는 그렇지 않았다. 서울에서 자취만 6년째이니 집에 드라이버가 있을 법도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드라이버를 대신할 수 있는 공구는 동전뿐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사할 시기마다 남자친구가 있었고, 필요한 공구는 남자친구가 빌려주거나 직접 고쳐줬기에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꼈다. '오.. 나름 공주 대접받았네~'라며 고마운 옛 기억을 떠올리곤, 억지로 동전으로 의자 조립을 시작했다. 아귀가 딱 맞지 않은듯했지만, 얼추 앉을만했다. 지금 당장 드라이버가 없으니 대충 만족하기로, 나랑 합의를 마쳤다.
이사는 2월이었으니 벌써 수개월이 지났고, 그사이 내겐 전동 드릴이 생겼다. TV 선반도 뚝딱, 사이드 테이블도 뚝딱. 전동 드릴로 나머지 DIY 가구들 조립을 완료했다. 이렇게 나는 조립도 잘하는 공주로 업그레이드된 거다. 이렇게 겉으로만 씩씩한 척,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쓱 닦던 어느 날. 주방에서 엄마와 통화를 나누었다. 전동드릴을 내가 얼마나 잘 쓰는지, 작은 사이드 테이블을 조립할 때 얼마나 희열이 있었는지, 당신 딸이 맥가이버 뺨친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한숨과 함께 그런 거 잘 하는 거 소용없다며, 언제까지 혼자 살 거냐며 대놓고 잔소리를 시전하셨다. 최근 몇 년간 들어온 잔소리이기에, 이번엔 좀 새롭게 방어해 봤다.
"엄마 나 '나 혼자 산다' 나가려면 혼자 살아야 돼. 그래서 결혼 안 하는 거야"
무슨 수로 '나 혼자 산다'에 나가냐며, 얼빠진 소리 좀 그만하라는 엄마의 타박이 이어졌다. 하나도 타격받지 않는 나에게 약이 올라서 더 언성이 높아진 엄마 때문에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덜컹. 이사할 당시에 대충 끼워맞춰져있던 의자 나사가 떨어졌다. 어수룩한 나사는 의자 등받이에 살짝 기댄 나를 지탱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맥가이버처럼 다시 전동드릴 사용해 끼우면 금방일 텐데, 난 이번에도 임시방편으로 대충 끼워두었다. 조만간 진짜 맥가이버 뺨치는 왕자 남자친구가 생기면 의자부터 조립해달라고 해야지 하며, 야무진 꿈을
꿨으므로.
30대 중반, 주변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보며 두 가지 마음이 든다. 씩씩하기 싫은 마음과 무엇이든 혼자서 잘 해내고 싶은 마음. 일단 이번엔 첫 번째 마음이 승리했고, 전동드릴은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당분간은 깊숙한 곳에 넣어둘 참이다.
통화 말미, 엄마의 목소리가 계속 맴돈다.
"그래도 씩씩하게 잘 지내~"
・ 글쓴이 : 이가루(35/여/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