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원피스. 등이 아름답게 파여있는 원피스 위에 잔잔하게 반짝이는 흰색 가디건을 걸쳤습니다. 각설탕을 닮은 가디건, 긴 머리카락,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눈동자는 까맣게 빛났습니다. 밤에만 느낄 수 있는 공기가 저를 휘감았습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밤, 특유의 공기 냄새가 났습니다.
배달이 한참 잘 되던 시기, 친구는 형을 따라 요즘 오토바이를 탄다고 했습니다. "배달이 그렇게 잘 벌어?" "그럼. 보름 만에 몇 백 벌었어." "와..." 9시 50분쯤 되자 가게는 마감을 했고, 집에 갈 채비를 했습니다. 친구와 형은 아쉬운지 집에 가서 한 잔을 더 하자 했습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한 시간 정도는 어떤데?" "그 정도는 괜찮은데.. 근데, 어디 가는데?" "안개 너희 집은 안 돼?" "형도 같이? 우리 집은 좀 그렇고.. 너희 집은?" "우리 집은 엄마 있어."
그럼 너희 엄마랑 같이 넷이서 마시자. 다같이 낄낄낄. 잠시 묘한 공기. "아, 그럼 형 집은?" "우리 집은 비어서 괜찮지. 난 혼자 산다." "그럼 형 집 가서 마시자. 안개 괜찮나? 가서 그 이야기 좀 해도. 그 마녀 얘기." "아, 그거 해서 뭐하게. 알겠다. 그럼 안주는? 과일 먹고 싶어." "오케이. 그럼 형이 과일 픽업하고, 난 편의점에서 술 픽업할게. 그 앞에서 만나자. 한 병만 마시자." "안개 타라." "야 안 된다. 술 마셨잖아." "요 바로 앞이다. 5분만 가면 된다." "5분이면 걸어가면 안 되나..." "만". 마법의 단어 만. 이것만, 저것만, 한 병만, 한 시간만, 조금만, 오늘만, 만만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형의 집은 커다란 대문이 있는 주택이었습니다. 끼이익. 쇳소리 내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장판에 철푸덕- 앉았습니다. 이 집 장어가 맛있대, 이 동네 맛집 없던데, 여기 진짜 맛도리야 월요일에 장어 먹으러 가자, 짠,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가 나 이제 진짜 가야겠다, 둘이 더 마셔, 하니 친구가 마녀 이야기를 해 보라며 재촉했습니다. 형 이 얘기 한 번 들어봐. 안주 거리로 딱 좋았던 마녀 얘기는 마녀가 처음 제게 말을 걸었던 그 날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 얘기도 아닌데 이렇게 얘기해도 되나요?
첫 직장에 출근한 스물 다섯의 저. "이 곳에 뼈를 묻겠습니다!!!" 당찬 포부와 함께 첫 업무를 몰라 헤매일 때, 마녀가 찾아왔습니다. 밝은 그레이색 렌즈에 까만 머리칼,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은 마녀는 평범한 직장인 여성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튄다..' 늘 안경낀 모범생들과 어울려 다녔던 저는 그런 마녀의 외모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안개야, 너 담당부장님 미친년이래. 상부에도 소문 다 났다던데 조심해. 혹시 이상한 소리 해도 마음 상하지 말고. 힘들거나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와서 다 물어봐. 언니라고 불러도 돼. 나는 한 층 아래에 있어." "감사합니다."
봄에서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됐습니다. 그 부장에게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가을 직원 체육의 날에 다시 마녀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오솔길을 걸으며 말문을 꺼냈습니다. "어, 언니. 저 며칠 전에 역전할머니맥주에서 언니 봤어요." "진짜? 인사하지! 맛있는 것 사줬을 텐데." "히히.. 남자 분이랑 같이 계시길래 좀 민망할까봐~" "아, 남자친구야.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걸까요? "남자친구 있구나! 전 없어요. 좋겠다. 남자친구 어디서 만났어요?" "응, 클럽에서 만났어." "네?" 흥미롭다.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다른 분들이 듣지는 않을까? 목소리 크기를 낮추는 저에게 마녀는 한 마디를 더 얹었습니다. "만난 지 한 달밖에 안 됐어. 그 클럽에서 제일 멋있길래. 다음에 같이 술 한 잔 하자. 어디 쪽 살아?" "네, 언니. 다음에 같이 놀아요. 전.. 화요일 쯤이 괜찮아요." "그래, 콜." 이 마녀 언니 얘기 더 듣고 싶다.
사거리 쪽으로 가는 길, 카카오톡을 켜서 9분 전 바뀐 마녀의 프로필 사진을 봤습니다. 노란 비니 모자를 쓰고, 집 안으로 보이는 곳에서 찍은 셀카를 올려두었습니다. '예쁘다...' 한 술집으로 들어가 메뉴를 주문하니,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예쁘시다며 음료수를 건네고 갔습니다. 마녀는 "어, 감사합니다~" 익숙해보였습니다. 어떤, 작은, 동경의 씨앗이 생겼습니다.
"직장 일 힘들지, 나도 적응 안 되더라. 그 여자가 힘들게 하지 않든?" "저 며칠 전에 그만둔다고 했어요.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언니..." "야, 그만둔다고? 몇 년을 해서 온 곳인데.. 나도 힘들었어. 내 얘기 해줄까?" "네." "난 일단 휴학했거든? 워홀 다녀온다고 하긴 했는데, 아 어디까지 얘길 해야 하나. 닌 이런 거 좀 잘 들어줄 거 같으니까 얘기해줄게."
마녀는 대학교 입학 후, 다같이 모인 술자리에서 한 여자(이하 서영)가 꼴보기 싫었다고 합니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선배들한테 꼬리치지 말라"고 했답니다. 서영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그 이후 휴학을 했다고 합니다. 워홀을 다녀온 마녀와 복학한 서영은 운명의 장난인지 다시 같은 수업으로 만나게 됐고, 둘도 없는 친한 친구 사이가 됐다고 합니다.
둘은 주말이면 클럽으로 함께 놀러다녔고, 서영은 클럽에 가면 주차장에 먼저 갔다고 합니다. 그 날따라 람보르기니였나, 좋은 차가 있었습니다. "야 마녀 너 혼자 들어가." "왜?" "난 여기서 차주 기다릴래." "언제 나올 줄 알고?" "몰라. 너 가서 놀아." 서영은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람보르기니 차 주인을 기다렸고, 마녀는 클럽 안에서 놀았습니다. 마녀의 정수리를 톡톡, 치면서 몇 명이서 오셨어요, 키크고 잘생긴 남자가 하는 말, 오빠들이랑 나가서 놀자. 제 친구 밖에 있어요. 그렇게 나온 마녀는 그 남자가 람보르기니 차 주인인 걸 알게 되고, 이 차 옆엔 누가 탈래 물어보는 남자의 말에 손을 번쩍 든 서영. 마녀는 벤츠에 탔다고 합니다. 그렇게 겨울밤을 누볐던 그들. 너무나 재밌는 이야기 아닌가요? 인터넷에서도 볼 수 없는 이야기. 저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래서요? 네. 네?? 그럼 그건요? 와 그땐 이랬겠네요 를 연신 외치며 누구보다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작은 유리 소주컵을 들어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꿀꺽, 마신 마녀는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람보 차주와 서영은 곧 사귀게 되었고, 람보가 그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걸 알게 된 서영은 임신을 했더랬어요. 그런데 키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람보는 집 안에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안 됐습니다. 서영은 아이를 낳으면 달라지겠지 생각했지만,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도 술 마시고 여자 향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새벽에 들어오는 람보를 보고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안개야. 알겠지? 남자는 돈이 다가 아니야. 돈 보고 결혼하면 이렇게 힘들다니까, 나도 얘 보고 알았어.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언니, 담배 피는 거 너무 멋있어요." "그래보이지? 아니야. 여자가 담배피면 만날 수 있는 남자가 반 이상 줄어들어. 나는 너무 어릴 때부터 펴서 끊지를 못하겠다. 우리 아빠 직장이 __이거든? 느낌 오지? 얼마나 날 잡았겠냐고. 근데 안 잡히지. 어쩌겠냐." "진짜요..? 언니, 저도 아빠 때문에 진짜 힘들어요. 아직도 저 통금 12시 넘으면 난리나요." "와, 지금도? 니 나이가 몇인데." "그러니까요.." "근데 나도, 야, 나 사실..."
그 이후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답답하리만치 잔잔했던 제 삶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야기가 큰 이야기라서가 아닙니다. 작은 모래돌멩이만 던졌어도 파문은 크게 생겼을 거에요. 아무튼, 직장 상사에게 담배 들킨 썰, 타투 들킨 썰, 농땡이 친 썰, 모던바 알바했던 썰, 워홀에서 만난 룸메들의 마약썰, 마지막으로 지금 남자친구를 로터리에서 만난 썰. 호빠 선수들이 들고 지나간다는 깃발을 들고 지나가는 남자친구를 보면서 모른 척 했다는 이야기까지 마친 마녀는 술기운에 취해 보였습니다.
듣다가 듣다가 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이 드는 아슬아슬한 수위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불법과 합법 사이의 줄타기에서 "그래도 돼요?" 물어보는 나에게 언니는 술을 쭈르륵, 따라주며 "안 걸리면 되지. 너 나 신고할거야?" 씩 웃었습니다. 그날 저는 술이 아니라 언니의 웃음에 홀렸습니다. "언니 얘기 너무 재밌어요. 더 듣고싶어요. 난 살면서 언니같은 사람 만나 본 적 없어. 다들 자기 얘기 안 하려고 하고, 숨기는 사람밖에 없지. 가식쟁이들! 직장은 그래서 더 답답한가봐. 아빠도, 직장도, 다 벗어나고 싶어." "안개야, 너 남자친구 없지? 내 아는 오빠 만나볼래? 진짜 사람 괜찮아."
"야, 진짜 재밌다. 그런 여자가 다 있어?" "얼마나 예쁘길래?" 음, 부드러운 메론을 아삭 먹으며 마녀를 떠올렸습니다. "있잖아. 직장에서 봤을 때는 진짜 튀어 보인다고 생각했거든? 술집이 살짝 어둡잖아. 테이블 위에 조명이 켜져 있고. 그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데 얼마나 예뻐보이던지. 진짜 예뻤어. 그렇게 예쁜 사람 처음 봤어. 내가 남자라도 진짜 따라다닐 것 같아. 성격도 사람 끄는 매력이 개쩔어." "와 진짜 나 소개 좀 해 줘." "그 언니가 너를 만나리? 이제 별로 친하지도 않아. 그 언니가 막말 좀 씨게 했거든. 야, 나 이제 진짜 가야 돼. 화장실 갔다가 집에 갈래." "그래, 우린 담배 피고 올게."
쉬이이, 폭포수를 쏟아내면서도 머리는 쉴 일 없이 도르륵 굴러갑니다. '아,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진짜 이제 뒤도 안 보고 일어나야겠다. 집에는 어떻게 가지?' 끼익, 이 집은 화장실도 문이 삐걱거리네. "어, 오빠, 둘이 같이 담배 피러 간 거 아니야? 얜 어디 갔대?" "집에 갔어." "헐. 인사도 없이? 뭐야. 나도 갈래." "넌 좀 더 있다가 가." "무슨 말이야? 친구도 없이 뭐야? 아니 진짜 어이없네." "어이없어? 뭐가. 잠시만 앉아 봐."
형은 제 각설탕 가디건을 잡고 가슴에 손을 뻗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