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에서 만났던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제 삶을 비유하면 어떤 것에 비유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잠시 고민하다 "모래"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예쁜 모래성을 쌓고 싶었습니다. 움켜쥐어도 손을 펴 보면 다 빠져나가고 남은 모래알갱이 몇 알.
대학교 4학년, 스물 네 살.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색 슬랙스를 입고 대구 동성로로 갔습니다. 남자친구는 친구들과 놀고 있었습니다. 네이버에 "대구 혼술" "동성로 혼술하기 좋은 곳"을 검색하니 한 가게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카사노바 라는 가게입니다. 작고 아늑한 공간, 긴 테이블이 있는 그 곳으로 갔습니다. 칵테일을 한 잔 주문해 마십니다. 맛있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반짝거리는 은색 명함, 옆테이블에 앉았다 간 남성 분, 가게 안쪽에 딸려있는 작은 화장실, 011인가, 018을 쓰던 사장님의 옛날 핸드폰, 키 큰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대화까지요. 집에 가려고 일어선 저에게 사장님은 한 잔을 서비스로 주셨습니다. 쪼옥, 쪽. 화장실 다녀올게요.
화장실. 씨발 화장실. 머리가 휘청했습니다. 고작 두 잔인데, 많이 마셨나. 물을 내리고, 손 씻을 데가 없어 그냥 나왔습니다. 어지러워. 손 씻는 곳은 어디에요? 주방으로 안내하는 사장님. 콸콸 떨어지는 싱크대 물길에 손을 씻습니다. 좁은 주방에 사장님이 뭔가를 가지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몸을 딱 붙입니다. 왜, 왜 이러세요.
도망치듯 부엌을 나와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이상해. 어지러워. 방금 전까지 버젓이 영업하던 이 곳은 불이 다 꺼져있었습니다. 눈 앞에 뿌옇게 되며 정신을 잃어가는데 테이블 저 쪽 멀리, 글자가 보입니다. 문에 붙어있는 양면 팻말입니다. 제게 보이는 글자는 "OPEN"
보통 사람은 살면서 한 번 일어나기도 어렵다는 일을, 두 세번 겪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내가 잘못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중한 사람들은 제게 질책하듯 말합니다. "조심했어야지." 그럼 저는 반박하듯이 따져묻습니다. "왜 잘못한 건 그 사람들인데, 내가 조심해야 해? 내가 잘못했어?"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그런데 잘못한 게 아니라도, 조심할 수는 있잖아. 널 아끼니까 하는 말이야. 조심해서 네 손해가 아니니까. 지금 일어난 일을 봐. 다 술하고 연관이 돼 있잖아. 그럼 술을 안 마시던지.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이는 거지. 보통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보통 사람들.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말입니다. 그럼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면 뭔데. 난 어떤 사람인데. 난 정말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행동도 보통의 행동이었어.
“싫어. 왜. 나 갈래. 저리 가.” 푹신한 침대로 절 데려간 형은 저를 눕히고서는 꾹 누르고, 자기도 옆에 누웠습니다. 무언의 압박에 빠르게 생존 전략이 떠오른 저는 형을 안심시키기로 했습니다. 물에서 나온 물고기처럼 힘을 축 풀었습니다. 형도 따라서 힘을 풀었습니다. 저는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형은 잠시 뒤에 가져다 준다고 했습니다. 저는 진정 좀 해야겠으니 지금 가져다 달라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투정. 형은 느릿느릿 움직여 물을 가지러 부엌 식탁으로 갔습니다. 전 날쌔게 대문을 향해 달렸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안개야, 너 가방.” 가방이 대수입니까?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달려 나오니 형이 따라나옵니다. 무서워. 골목벽에 기대어서서 속으로 친구를 욕했습니다. 분명 둘이서 짝짝쿵을 한 게 틀림없습니다. 개새끼. 난 지 믿고 온 건데. 형이 미안하다며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제 아파트 앞에 오니 다리가 휘청 풀렸습니다. 익숙한 향기, 익숙한 공간. 관리실도 있는 안전한 곳. 잔뜩 긴장했던 몸이 그제서야 풀어졌습니다. 낡은 계단을 뚜벅, 뚜벅 올라가니 자동센서등이 제 앞을 밝혀줍니다. 3층에 멈추어 섭니다. 정다운 제 집은 계단 끝과 문이 맞닿아 있어 마지막 계단 한 칸을 오르지 않아도 비밀번호를 입력할 수 있습니다. 4967# 문을 열자 제 집이 눈 앞에 펼쳐지고, 끄지 않고 갔던 불들이 환하게 저를 맞아줍니다. 그때, 뒤에서 턱. 하고 손이 들어왔습니다. 뒤이어 들리는 쿵. 문이 닫히는 소리. 찌지직. 도어락 잠기는 소리. 말도 안 돼. 형이 서 있었습니다.
찰나의 순간은 지옥 같았습니다. 손을 뻗으니 손끝에 느껴졌던 털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형은 비틀거리며 금방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침대에 앉아, 수건으로 아래를 막고, 망연자실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30분 정도 지났을 겁니다. B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음 소리가 길게 들리더니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조용한 방에서 울리지 않는 핸드폰만 쥐고 있었습니다.
카사노바 사장님은 저한테 몹쓸 짓을 했습니다. 곧이어 제 얼굴과 블라우스에 물을 뿌렸습니다. 차가운 물에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나와, 핸드폰으로 남자친구 번호를 눌러, 전화를 했습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흐느끼는 제 목소리를 한참을 듣다 남자친구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말을 하던가. 어쩌라는 거야. 나 친구들이랑 놀고 있다니까." 이 사람에게 뭘 말하겠어. 전화를 끊고 한참 얼이 빠져 있다 잠에 들었습니다.
"신고해!!!" 다음 날 점심,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제 이야기를 듣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럴까 했는데... 증거가 없어. 촬영도 못 했고, 녹음도 못 했어." "그럼 전화해서 증거 없어도 괜찮냐고 물어봐봐." 경찰서로 전화를 했습니다. 일단 오라고 해서, 두려운 마음으로 중구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진술서 비슷한 걸 쓰고 위로를 받은 뒤에 사장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옆에서는 경찰 아저씨가 듣고 있었습니다. "어제, 저한테 사과하실 것 없으세요?" "없는데. 왜?" "어제 그런 일 있었잖아요." "뭐 말하는 거야? 너, 어제 여분 배터리 두고 갔어. 다음에 가지러 와." 증거가 이 새끼 입에서 나올 리가 없습니다. 조금은 허탈한 심정으로 경찰관님께 조사를 맡기고 경찰서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제 무슨 일이었는데?" 데리러 온 남자친구가 운전석에서 묻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빠앙, 화가 나는지 운전석을 쾅 닫고 나갔다 다시 후, 하더니 들어와서 혼자 술을 왜 마시러 갔냐고 묻습니다. 왜, 왜 먹으러 갔을까요. 나는 왜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걸까요. "그냥. 술 마시고 싶었어." 사실 자존심 상해서 못했던 말은 있었어요. 오빠가 나랑 같이 안 있어줬잖아. 원망섞인 말 하고 싶었어요.
몇 번의 조사 끝에 저를 소환한 경찰관님. 빨리 종결하고 싶어 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미 두꺼운 서류 더미를 들춰봤습니다. CCTV 확인해봤는데 술집에서 나와 핸드폰을 누르면서 걷고 있는 제 행동이 그런 일을 당한 사람처럼 안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 당한 사람같은 건 뭔데요. 왜 그 날 바로 신고 안 했냐고 합니다. 그날, 그날 저한테 들이밀었던 그건, 그건 물통이 아니냐고 합니다. 물통이요? 물통이요?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세요? 그 경찰은. 상대방이 저를 무고죄로 고소할 거라고 했습니다. 제 앞날, 취직에 엄청난 영향이 있을 거라고요. 취직 정상적으로 하고 싶지 않냐고요. 무서웠습니다. 한창 미투 운동이 많을 때라서 민감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검정색 비닐봉지를 책상 밑에서 꺼내더니, 제 앞에 들이밀었습니다. 카사노바 술집의 정수기 모양 물통이었습니다. "이거죠? 술 많이 마셔서 착각한거죠?"
"안개야! 넌 진짜 맑다. 착해. 순수해. 예뻐." 이해를 못했습니다. 뭐가 순수하다는 거야. 나도 알 거 다 알고, 생각도 다 하는데. 뭐가 달라보이는 거지. 물통을 들이미는 경찰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아. 이런 걸 몰라서, 순수하다고 했던 거구나. 세상의 어두운 면을 나는 보지 못하고 자랐던 거구나. 물통은 저에게 허탈감을 줬습니다. 아니, 물통 잘못은 없겠지요. 저는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예. 맞아요. 그런 것 같네요. 이제 가 봐도 될까요." 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나와 계단에 앉았습니다. 10여분을 앉아 있었을까. 퇴근하는 경찰관이 저를 지나 내려가며 "왜 아직 여기 있어요."하더니 어깨를 툭툭, 칩니다. 위로의 툭툭일까요. 내려가니 남자친구가 절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젤리, 달콤한 푸딩을 준비해뒀습니다. 안겨서 한참을 우니 남자친구가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 합니다. "괜찮아. 나 진짜 괜찮아. 그냥 이제 그만할래. 이게 더 힘들어. 평소처럼 다시 되돌아갈래." 여러분, 저 진짜 괜찮아야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