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람쐬러 갈래?" 뭐가 그리 불안했던지 회사가 어두운 게 좋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불을 다 꺼두고, 모니터 화면만 켜둔 채, 숨어지냈습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종종 들리지만 귀를 막았습니다. 환한 공간은 제 집중을 분산시켰습니다. 빛을 보면 뛰어들어 제 몸을 태워버리는 벌레처럼, 제 자신을 갉아먹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바람쐬러 가자는 B의 제안은 마른 폐에 호흡을 불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B는 나쁜 놈이고 제가 멀리해야 할 인간, 제 삶에서 삭제하고 싶은 인물이었지만 말입니다.
창을 내리면 바람이 쉬익- 불어옵니다. 팔을 내밀지만 다칠 만큼 내밀지는 않습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파아란 부분은 잔잔하고, 하얀 부분은 쉼없이 부서집니다.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난 이렇게 평화로운 게 좋아. B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어떠냐 물어봅니다. 저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차 안에는 B가 운전대를 돌리는 소리, 스치는 바람 소리, B가 잔잔하게 흥얼거리는 소리만 들립니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 그럼 진짜 좋겠다. 그 순간,
"우~우-리의 만!!!남~~ 우리의 이히이별-------- 그 영원한 약쏙들으으으을--!!!!!" B가 열창을 합니다. 피식, 오늘들어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짓습니다. B는 제가 웃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B가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어느 날 그대를 만나서..." B는 울지 않는 데도 우는 것 같고, 웃고 있는 데도 웃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그만 해 주세요. 그냥 안 할래요. 누구 좀 불러주세요." "제발 조금만 가만히 계세요." 아침이 밝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집으로 왔습니다. 경찰에 당한 기억이 있기에 신고 안 하고 싶다, 했지만 절 도와주러 온 J는 자기가 대신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2시간 뒤에 저는 알겠다고 했고, J는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국과수는 수건을 증거물로 가져갔습니다. 속옷도 지퍼백에 담아갔습니다. 각설탕같던 하얀 원피스와 가디건도 사진으로 찍고는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어지럽혀져 있는 더러운 제 방도 찍어갔습니다. 여자 분은 빈 방으로 가서 저에게 이것 저것 물어봅니다. 대답도 잘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말을 받아 적다가 J에게 혹시 이 분 장애가 있냐고 물어봅니다. J는 아니에요,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아요. 라고 말합니다.
곧이어 해바라기 센터에 가서 검사를 하고, 채취를 했습니다. 제게는 국선 변호사가 붙는다고 했습니다. 몇 년 전과 사뭇 다른 태도에 뭐가 달라진 거지, 의아합니다. J는 출근을 하지 않고 제 곁에 있다가,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혹시 있을 지 모르는 나쁜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없애기 위해서 제게 주사를 놓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맞아본 모든 주사 중에 가장 아팠습니다. 두 번을 맞았는데, 주사 놓는 분의 팔을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아파야 해, 나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왜 그 사람은 안 아프고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해, 그 사람 잡아다가 이거 놔주면 안 되나요, 머리 속에는 물음표만 떠다녔습니다. 두 명이 와서 저를 잡았습니다. 주사가 오래도록 팔 안에 있었고 팔은 동그랗게 부풀어올랐습니다. 다행히 J와 찾은 떡볶이 집은 정말정말 맛있었습니다.
선한 마음.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거라고 여겼는데, 그게 잘못됐던 걸까요?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은 돌연변이들이니까 나오는 거고, 대다수의 사람은 비슷할 거라고. 다들 배운 대로 착하게, 선하게 살 거라는 따뜻한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봤어요. 이제는 그 마음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마녀의 집이었는지, 카사노바 술집이었는지, 조사받던 경찰서였는지 4967# 누르고 들어간 안락한 제 집이었는지 모르겠어요. 하나 분명한 건, 선한 마음과 함께 분노나 미움같은 마음들도 다 함께 두고 온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어느 순간부터 중얼거렸습니다. "난 아무도 안 믿어. 내 자신조차도. 사랑? 사랑은 호르몬의 장난이지." 물론 B도 저한테 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당근마켓에서 만났던 청년에게 감정이 사라진 세상이 좋다고 한 이유입니다.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해야 하고, 웃어야 하고, 활기차고 명랑한 태도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했는데 말이에요. 맡겨진 일은 깔끔하게 해내고 거기에 더해 알아서 척척 미리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요. 현실은 그렇지 않아 주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쟤 요즘 왜 저래. 앞선 일들을 힘들어해버리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모래성이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것처럼, 모든 게 바스라질 듯, 네. 사실은 전 조금 아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