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아스팔트, 치킨집 유리

by 안개

B와 함께 B의 옛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중학교 시절 만나던 친구들인데, 질이 좋지 않은 친구들이라 지금은 잘 만나지 않는 친구들이라고 했습니다. (연주 사건이 있던 다음 날이었지만) 감사하게도 흔쾌히 저를 함께 부르길래 바로 옆 술집으로 갔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친구 한 명이 무언가를 감추는 것 같았습니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느낌이요. 노래방을 가자고 해서 갔더니, 그 친구가 여자랑 같이 놀고 싶어 죽겠다고 여자를 불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죠. 친구 여자친구가 떡하니 있는데 이런 행동을 하다니요. 속마음이 일그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곧이어 도착한 여자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습니다. 중간중간 저를 째려봤습니다. 너 뭐냐는 듯이요. 저는 지지 않고 그 여자를 맞째려보며 화를 꾹꾹 눌러놓았습니다. 계속 술을 먹다 어떤 친구가 B더러 요즘에도 힘이 좋냐며 팔씨름을 하자고 했습니다. B는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근육이 다 빠졌다고 하면서 소주병을 밀어 두고 팔씨름을 했습니다.


B의 손이 점점 내려가면서 제 자존심도 함께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한두 시간이 지나 노래방을 나올 때 저는 꽤 많이 취해있었고, B도 그랬습니다. 팔씨름을 한 친구에게 괜히 화풀이를 해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아직도 생각나는 걸 보니 그들은 제가 왜 그랬는지도 모를 텐데, 이상한 여자가 되는 게 싫었던 겁니다. 그때 누가 봐도 이상했거든요. B 보기에도 민망했습니다. B가 이상한 여자친구 사귄다고 주변에서 쑥덕거릴까 봐 죄의식이 들었어요. B의 사회적 관계에 아무것도 아닌 제가 쑤욱 들어가서 헤집어놓은 것 같았어요. 이 남자가 친구들로부터 우스워보이진 않을까.


비틀거리며 나오는데 해가 뜬 게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 옆을 지나 터벅터벅 올라갔습니다. B가 어딜 가냐며 따라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B가 따라올 때 좋습니다. 아스팔트 위에 철푸덕 앉았습니다. B가 따라 앉습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같이 해주는 B가 좋았습니다. 취했다는 핑계로 도로에 누웠습니다. 어디 뉴스나 신문에 나올 법한 여자가 됐습니다. B는 저를 일으킵니다. 그때 하늘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집니다. 볼에, 눈에, 머리에, 어깨에 떨어집니다. 아픕니다. 그러니 B가 슬쩍 눕는 포즈를 취합니다.




한 번은 치킨집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놀러갔습니다. 불안불안했지만 무슨 일이 있겠어, 덮어두고 갔습니다.

뭔가 이상한데, 처음 참여하는 저도 눈치챌 만큼 분위기가 묘합니다. 아마 B와 친구들은 상위포식자고 치킨집을 하는 친구는 꼬봉인가봅니다. “그” 친구들은 또 개념 없는 소리를 지껄입니다. 한숨이 나와 자꾸만 술을 들이켰습니다. 화장실을 갔다가 나오는데 무리 중 여자 하나가 저한테 눈을 부라리며 궁시렁거리더니 화장실 안으로 쏙 들어갑니다. 성깔이 긁힌 저는 화장실 문을 발로 찼습니다. 쨍그랑하며 화장실 문이 깨졌습니다. 발로 찼다고 이렇게 깨질 줄은 몰랐는데.


치킨집 친구가 오더니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날카로운 유리를 담습니다. 그 여자는 쏙 나가고 안절부절하는 저에게 꼬봉 친구는 괜찮다고 가라고 합니다. 물어주겠다며 쓸모없는 실랑이를 하다가 자리로 가보니 그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 B와 저만 남은 겁니다. 친구들이 말도 없이 가버리니 B도 저 보기가 민망하고 조롱당한 것 같은지 심란해 보입니다. 그 주 주말은 그렇게 어둡게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즐거웠는데 왜 우리의 주말은 어두웠을까요. 집에 돌아간 우리는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빽빽하게 공책에 교환일기를(?) 썼습니다.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아까-그러니까 몇 시간 전-자신의 감정을 살피며 말이에요. 아마 속에 얹힌 듯한 뭔가를 풀고 싶었나 봐요. 서로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감정이 와닿았어요.


B는 친구들에게 쪽팔리고, 저는 B에게 쪽팔림을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하고, B는 제가 신경 쓸까 봐 걱정하고, 그렇게 주말이 지나갔습니다. 도대체 제가 왜 B 같은 남자 때문에 ‘이상하고 이해 안 되는‘ 걱정을 했을까요?


며칠 전 인스타그램 돋보기에서 이런저런 게시글을 구경하다가 저랑 비슷한 연애를 한 여자가 쓴 글을 봤습니다. 놀랍게도 제 마음과 비슷했어요. 과연 사람들은 무어라고 반응할까. 댓글창을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클릭했습니다. 좋아요 수를 많이 받은 댓글이 보였어요. “저런 애들은 말해도 모르고 또 저런다” 좋아요 수가 올라갈수록 평평한 핸드폰 액정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보였어요. 내가 바보 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 아직 B가 여자 문제 빼고는 정말 B를 사랑했고 B는 그거 빼곤 괜찮았던 사람이라는 흔한 말을 읊조리는 사람이 된 게 사실이에요. 식상하게도. 내 아픈 이야기는 진짜 인스타그램 돋보기에 나오는 썰이랑 싱크로율 100%이 될 정도로 흔한 썰이 되었으니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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