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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을의 찰나

독백 Ver. 윤문, 퇴고 없음 주의.

by Jin

독백 Ver.

윤문, 퇴고 없음 주의.



Jin / 25. 12. 04

'


까만 어둠을 비집고 해가 뜬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 사이로 자신의 붉음을 마구잡이로 흩뿌리며 오늘이 왔음을 알렸다. 방에서 눈을 비비고 걸어 나와 책상 위 카메라를 집어 든다. 날아다니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와 함께 들리는 경쾌한 셔터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Jin / 25. 11. 22



아이가 학교로 출근할 때, 시간이 되면 나도 그 옆에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학교 앞까지 함께 걷는다. 하나의 횡단보도와 하나의 육교. 10분도 되지 않아 학교에 도착해 아이와 안녕. 하고 간단한 손 인사를 나눈 후, 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Jin / 25.11.22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Jin / 25.11.22



11월 말까지 푸르름과 약간의 단풍을 자랑하던 산은 1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을을 맞았다. 여름의 산과 산책이 단순히 푸르름을 스쳐 지나가는 2D 같았다면, 가을의 산은 눈과 귀, 뺨에 스치는 바람까지 선명히 느껴지는 4D의 선명함으로 다가왔다.



Jin / 25. 12. 02



푸름과 붉음이 뒤섞여 있는 이 공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Jin / 25. 12. 02



뜨는 해가 나무 사이사이로 햇빛을 흩뿌린다. 빛이 스며드는 노란 낙엽 사이로 나는 다급히 셔터를 눌러본다. 나무 사이로 햇빛이 지나가는 시간은 늘 찰나에 불과하니까. 평소에는 클로즈샷처럼 사물 위주의 사진을 더 좋아하지만, 가을만큼은 어쩐지 풀샷의 전체 장면에도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Jin / 25. 12. 02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놓인 빛은, 찍는 이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같은 나무라도, 다른 공간에서 찍은 것처럼. 혹은 다른 나무를 바라본 것처럼 전혀 다른 장면이 된다.



Jin / 25. 12. 02


같은 장소라 하더라도 아침 해가, 오후의 해가 저녁의 해에 풍경이 달라지듯. 내 마음 가는 대로 담아낸다. 가을의 초입인 듯, 겨울의 초입인 듯.



Jin / 25. 12. 02



어떤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한 이틀만 더 익으면 참 예쁘겠다’ 싶었다. 하루를 건너뛰고, 25년 12월 4일. 다시 카메라를 손에 쥐고 산을 올랐다. 그리고 내가 찍고 싶었던 그 나무 앞에 섰을 때, 허탈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Jin / 25. 12. 04



찰나는 내가 정할 수 없는 것임을 다시 알려주듯, 나무 아래에는 낙엽이 가득 쌓여 있었고 텅 비어버린 나뭇가지는 바람에 야속하게 흔들렸다.



Jin / 25. 12. 04



덜 익어 바스락 소리조차 내지 않는 낙엽을 괜히 자근자근 밟으며 분풀이를 해보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찰나들이 다시 돌아올 리는 없었다. 오만했음을 인정해야 했던 날. 카메라를 감싸 쥐고 산을 정처 없이 떠 돌았다. 할당량을 채우듯.


Jin / 25. 12. 04



해가 저 산을 넘어 떠오르는 그 시간을 기다리며, 가을의 찰나들을 천천히 수집한다. 나무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저렇게 찬란한데, 정작 내 손끝을 녹여주지는 못하는지 손 끝의 감각이 무뎌진다.



Jin / 25. 12. 04



손 끝을 호호 불어가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벗어나 메인 산책길에 섰을 때, 감탄이 흘러나왔다. 햇빛을 잔뜩 받고 자란 것들의 특권. 붉고 노란 낙엽들이 바람에 실려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빛 좋은 한복을 입은 누군가가 춤사위를 펼치는 것처럼 보였다.



Jin / 25. 12. 04



춤사위를 끝낸 낙엽들은 파르르 거칠게 지나가는 바람에 오래 참아온 눈물처럼 나뭇가지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눈 대신 낙엽이 내리는 부산, 겨울 초입의 찰나가 막 시작되었다.






Jin / 25. 12. 04



나무와 나무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많이 닿은 순서대로 천천히 붉은 기운이 번진다. 저 붉고 노란 것들 사이에서 같은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다른 계절을 품고 초록을 놓지 못한 잎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은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이들에게도 변화를 위해 받아야 할 빛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이들은 “빛이 충분히 쌓일 때까지 기다려. 빛이 충분히 쌓여야 비로소 계절을 바꿀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따사로움을 충분히 받다 보면, 계절이 바뀔까. 스치는 바람이 툭 건드린

나에게서 어떤 마음이 툭하고 떨어져 나와 저 낙엽들 사이로 데굴데굴 굴러 사라졌다.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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