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 시간이 비싸다.
지금으로부터 14년전 성인이 됐다. 그땐 아주 빈곤했다. 게다가 그때는 뭐 때문에 빈곤한지 조차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더욱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당연히 빈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나는 눈 앞만 생각했다. 돈은 없는 주제에 술은 마셔야해서 대학동기들과 3천원짜리 김치찌개 하나를 시켜놓고 소주를 홀짝댔는데, 거나하게 취하고 나면 버스가 끊겨 있던 적이 꽤나 있었다. 그럴때면 나는 항상 10km 이상 되는 거리를 3시간 동안 걸어서 집에 왔다. 다음 날 무슨 일이 있던 간에 그건 내일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고 '돈을 아끼는 것'에만 집중했었는데, 그 다음 날이면 항상 다양한 방면으로 탈이 났다. 배탈이 난다거나, 지각을 한다거나, 피곤해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거나 하는 형태로. 차라리 그 시간에 알바를 했다면 최저시급으로 쳐도 그게 더 나았을텐데 그냥 아끼는게 능사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4년 후, 서울에 상경했다. 촌놈티가 벗겨지지 않았던 나는 이 때 까지도 비슷했다. 상경 첫 날, 이미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친구를 만나 강남에서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또다시 습관처럼 강남에서 건대입구까지 자그만치 5시간을 걸어서 집에 왔다. (한강 다리가 나올 때의 절망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하고 있었는데, 친하게 지내던 동생 하나가 "그러면 다음 날에 지장 갈 거 같아요. 그것보다는 택시비가 더 싸게 먹히죠" 라는 말을 하더랬다. 놀랐다. 싸게 먹힌다니. 돈이 싸게 먹힌다니. 안 쓸 수 있는 걸 쓰면 낭비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너무 아둔해서 한 번도 생각치 못했던 관점을 마주하니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계속 고민했다.
"싸게 먹힌다는 건 어떤 기준일까."
그 사건을 기준으로 나는 마냥 아끼던 사람에서 적절히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했다.
뭐 지금은 그때보다야 풍족해졌기 때문에 씀씀이 자체가 커진 것도 있지만 단순히 씀씀이가 커진게 아니라 쓸 이유가 명확하면 확실히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택시를 탄다거나, 좋은 옷을 산다거나, 선물을 한다거나 하는 행위가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씀씀이의 변화는 단편적으로 보이는 소비량의 변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줬는데 그건 바로 대부분의 소비가 투자의 일종임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건강을 위한 투자다.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대외적 이미지를 위한 투자다.
좋은 차를 타는 것은 이미지, 안전 등 여러 의미로의 투자를 포함한다.
그래서 이젠 작은 청소는 직접하지만 큰 청소는 사람을 부른다. 그 시간에 일을 하거나 잠을 자는게 더 낫다. 오히려 더 개판으로 만들 여지가 있다.
법무사, 세무사, 노무사, 변리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은 반드시 제 값을 치른다. 내게 그 지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내게는 내 영역에서의 전문 지식이 있다.
택시는 탈 이유가 있으면 반드시 타지만 이유가 없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늦거나 땀흘리며 냄새 풍기는 것 보다 그게 훨씬 싸게 먹힌다.
이렇듯 예전에는 전문가 손을 빌려야 하는 일이 생길 때, 그래도 어떻게든 혼자 해보려고 시간을 쏟았지만 이제는 무조건 전문가에게 맡긴다. 내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에 시간을 쏟느니 그 시간에 내 일을 하거나 내 능력을 키우는 편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낫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즉, 쏟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돈을 쓰는 편이 훨씬 싸다는 것이다.
싸게 먹힌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행동한다.
1. 돈보다 시간, 사람, 건강이 훨씬 비싸다.
2. 돈으로 만회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한다. 그건 싼거다.
3. 만회할 돈이 없으면 안된다. 돈을 아끼기 위함이 아니라 벌기 위해 움직인다.
이걸 깨닫고부터는 인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아껴 모은 돈이 아니라 돈을 써서 아낀 시간들이 조금씩 모여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직 소비가 투자라는 걸 몰랐다면 14년 전 택시비를 아끼려 3시간을 걷던 찌질이는 지금의 내 모습을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