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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구 Aug 29. 2020

실패를 인정해야 다음이 있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때문에 한 번이라도 실패를 겪은 후에는, 그 다음 실패부터는 실패의 원인을 방어기제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찾는다. 날아오는 돌에 맞은게 아니라는 가정하에, 복기해보면 분명 본인 문제가 최소 5할은 넘는데도 실패의 원인을 타인, 상황 등 외부에서 찾는다. 하지만 실패한 입장에서는 심적으로나 상황으로나 그럴 여유가 없어서, 내 문제가 아니라 다른 뭔가의 문제가 있는 거라고 책임을 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실패는 고착화되어 앞으로의 미래에도 동일한 실패를 불러온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여기서 더 성장하지 못하고 멈춘다. 현실이 그렇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인정하지 못해서 깨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고, 그 힘든 이들이 원망의 타겟으로 삼은 다른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드는 상황이라 점점 더 더불어 살기 힘들어지고 있다. 더더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셈.


그러므로 어설프게 도울 바에는 아예 하지 않는게 낫고, 할거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어설프게 돕다가 실패하면 여지없이 원망의 타겟이 된다. 성패는 오롯이 본인에게 달려있지만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분명히 도움을 준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쏴댈테니까.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돕는' 행위는 에너지로 치환될 수 있는데, 개인이 소유한 에너지와 시간은 제한적이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변환하는 것을 기본가치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야속한 말이겠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쳐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 힘들게 건져놓으면 없어진 짐 내놓으라고 달려들 수도 있고 무시하고 지나쳐서 허망한 경우도 있다. 그냥 가면 다행이지, 달려들면 그 때부터는 머리가 아파진다.


이것이 언제부턴가 내가 타인을 함부로 돕지 않는 이유다. 예전에는 적은 비용을 받고 최대한 돕겠다는 공리주의적 발상을 삶의 모토로 삼았던 때도 있었다만 지금은 그때를 후회하고 있다. 이렇게 물어 뜯길거면 아예 돕지를 말걸. 도와도 그냥 무료상담 정도로만 돕지 어줍잖은 수업료 받아가며 돕지 않는다. 다만 크고 확실한 도움을 바라는 이에게는 동일한 가치의 대가를 제안할 뿐이다. 


주어진 시간은 제한적이라 어차피 내 사람밖에 챙길 수 없다. 인간은 절대 이유없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이타적이라는 말을 일삼는 사람이라면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위선자거나 모르면서 돕는다고 까부는 병x 중 하나라, 이제는 그 어느쪽도 되고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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