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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Jan 16. 2024

진즉 말허지 그랬냐잉?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 소심해서 죄송해요




<유쾌하고 부지런한 순이 씨>


순이 고모는 1월부터 아침 아르바이트를 나간다고 했다. 싱크대에 선 채 아침을 드시고 운전하여 어디론가 가신다. 식물을 묶는 일이는데 이름을 모르겠다하셨다.


고모는 무얼 하기 귀찮다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 뭐든지 바로바로 한다. 솥에 밥을 안치고 생선을 굽고 배추를 뽑아다 씻고 양배추를 통째로 찐다. 아무 걸림과 막힘이 없이 그냥 한다. 그런 경지가 놀랍다.


점심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게이트볼장으로 가서 동무들과 점심을 드신 후 해 질 녘까지 게이트볼을 한 뒤 저녁을 차리러 들어오신다.

"게이트볼이 건강 주사여. 아플 일이 없응께."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저녁을 먹고,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고모는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7시 드라마를 보신다.


거지를 끝낸 나는 우쿨렐레 연습을 하러 방으로 들어고, 고모는 8시 드라마를 보다가 거실에서 잠이 드신다.

나는 방에서 책과 브런치 읽 열 시쯤 잠든다.


종일 환기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 악취 속에서 잠든 나는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여러 번 다.

이틀 동안 나는 매우 날카로워다. 언제, 어떻게 말씀을 드릴까.

'고모, 제발 눈치 좀 채 주세요'


고모 살림 스타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안 될 것 같아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고모가 외출하신 동안 방에서 냄새의 요인을 찾아기도 다. 침대 밑이나 문갑 뒤에서 말라빠진 물휴지나 음료수 병뚜껑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오지만 딱히 악취의 요인은 발견되지 않다.


아침 8시쯤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뒤엔 온 집안의 문을 죄다 열어놓고 청소를 한다.

개 똥을 치우고 마당을 싸리비로 쓴다. 커피를 타서 마당으로 나가 들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데도 마음이 탁 트여서 최대한 집안으로 게 들어간다.






<소심하고 예민한 시녀>


마당 청소까지 끝내면 집을 나가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치민다. 미남이와 쨍이가 울부짖는 걸 외면하고 도서관으로 내뺀다.

노트북 사용할 자리가 불편한데도 집보다 낫다. 인터넷이 연결되고 냄새가 안 나니까.


해 지기 전 귀가하여 미남이를 산책시키며 녀석과 나의 스트레스를 걷고 달리는 것으로 푼다.

바다까지 달려갔다 돌아오면 5천 걸음쯤 된다.




고모와 유일한 한 끼, 저녁 식사를 한다.

고모는 아낌없이 양념을 써서 반찬들이 진하고 맛있다.

단지, 고모의 입안에 들어갔다 나온 숟가락이 양념간장과 백김치와 양념게장과 감태무침을 휘젓는 것은 좀... 비위가 상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 세뇌한다.

'원효의 해골물을 기억하자.'

 '여기는 오지다. 여기 왔으면 여기 법대로!'


고모는 아주 건강하시다. 모의 살림 습관 중깔끔포장도시녀가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이 있긴 하지, 76세의 연세에도 아픈 데가 없다고 하니 고모의 살림에 내가 청결 운운하며 나설 일이 아니다.

그래도 냄새 문제를 말씀드릴 순간을 기다린다.(청국장 냄새 비슷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두고 있다.)



손큰 고모가 반 푸대(자그마치 5만원)를 샀다는 감태.


나는 한 공간 함께 있는 있는 사람이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무심한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이렇듯 심한 냄새를 어째 이렇게 모르실까 싶어서 고모에게 화 내면 어떡하지 걱정다.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갈 순 없는데...




<뜻밖의 순간에 해결되었다>


화요일,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는 내게 고모가 물었다.

"내일 새벽에 공중목욕탕 갈래?"

나는 여기 와서 모든 걸 경험해 보자 하였으므로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 날 새벽 6시. 

고모가 동네 목을 돌며 세 할머님들을 차에 태운다. (고모는 여자들의 호프!)

나는 으로 외다.

'큰일 났다. 부끄럽게시리. 워!'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면 단위 공중목욕탕의 진풍경, 글 쓰는 지금도 웃음이 다.)


목욕을 끝낸 다음, 내 라커를 열 청국장 냄새가 훅 풍다. 는 얼른 문을 닫다.

퀸 사이즈 침대 크기밖에 안 되는 작은 라커룸에 할머니들 일곱 분이 목욕을 끝내고 수다삼매경에 빠져있는데, 그분들이 냄새를 느끼고 나를 볼까 봐 난다.


속옷, 바지, 외투 할 것 없이 냄새가 진동다. 나는 되도록 할머니들과 멀리 떨어져 옷을 주섬주섬 입고 현관에 나가 고모가 나오기를 기다다.

아르바이트를 가신는데 고모는 느긋하다. 한 달 전 인공 무릎 수술을 한 할머니가 계셔서 모든 게 느리게 이루어다.


집에 돌아오자 고모가 목욕탕 냐고 묻는다. 나는 용기를 내 말다.

"좋았는데요. 아까 목욕탕에서 사물함을 여니까 옷에서 청국장 냄새 같은 게 확 라고요"

고모가 나를 동그랗게 눈 뜨고 보신다. 아닌가? 나는 움츠러든다.

"무튼 비슷한 냄새가 제 옷에서..."

"국장 맞아."

"네?"

청국장 냄새 같았지만 청국장으로 특정하진 않았는데...


"국장 띄웠어야. 너 오기 며칠 전부터 문 열어 놓고 냄새 뺀다고 뺐는디 그래도 나드냐?"

"네, 아주 많이요."

그제야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하다.

"나는 냄새를 못 맡게 됐시야. 코로나 걸린 뒤로 암것도 못 맡아."

고모는 거실 구석에 청국장 환이 든 통을 가져와 보여준다. 

마이갓! 진작 말씀해 주시지. 청국장 냄새가 날 수 있으니까 이해하든가. 

"너도 매일 이거 퍼 먹어야. 암이 절대로 안 걸레(걸려). 고모 봐야. 염증도 읎자네."


나는  진작 말하지 못했을까.

유난스럽다는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나서였다.

고모는 앞으로 방문을 열고 자라고 솔루션을 제안했고, (소심한 나는 그러면 기분 나쁘실까 봐 그마저 못했다) 탈취제 따위를 사다 놓자고 했다.

"앞으론 불편한 거 있음 다 말해야. 끙끙대지 말고."


냄새의 정체를 모를 때는 '도대체 어디지? 뭐지?' 하고 화가 났는데(고모가 살림살이를 잘못해 어딘가 썩어가고 있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반찬 먹기도 께름칙하고.)

고모가 후각을 잃었다, 안쓰러웠다.


지난 월요일에 내려온 뒤 팔 일째, 냄새는 점점 옅어지고 있다. 그래도 도서관에서 내 옷 냄새를 맡은 옆 사람이 불편할까 봐 옷가지를 내 차 안으로 옮겨두었다.




보탬 :

고모는 하루에도 서너 번 이상 이 말을 한다.

"닌(넌) 글이나 써. 밥은 내가 항께."

목욕탕동행하는 할머니들, 고모 댁에 놀러 오는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알은체를 하신다.

"오메, 글 쓰러 왔다는 조카구마잉."

순이 고모는 내 소문을 도대체 어디까지 내신 걸까.

지금 거실에는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진 할마씨가 있다.

무섬을 몹시 타는 나지만, 비바람 소리가 윙윙대는 밤이지만, 하나도 안 무섭다.





#무안 #시골살이

#한달살이 #목욕탕

#냄새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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