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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Jan 19. 2024

워메, 미챠븐거

무안 시골설이 적응기 - 죽음, 삶과 멀지 않다




삼십 년 전 여름.

대학 다니는 동안 여름방학마다 10박 11일씩 농촌활동을 다녔다. 4학년 앞두고 중퇴할 때까지 빠지지 않고 참여하던 스물 살 여름에 해남에서 활동을 마치고 이 마을에 왔다. 버스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가는 학교 사람들과 떨어져 2박 3일 동안 나 홀로 여행을 하고 싶어서였다.


해남 어른들께 받은 에너지로 한껏 충전된 상태(민중 속으로,라는 사명감 섞인 열정의 마음이었다)라, 큰고모 내외분께 인사드리고 올라가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던 것.(그때 순이 고모는 경상도에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


시외버스를 타고 면소재지에서 내려 이 마을로 걸어가는 동안 밭에서 일하다 말고 허리를 펴는 농부님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고모 댁까지 가는 동안 마주친 어른들이 반갑고도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누귀네 자손일까잉?"

"아무개 씨 조카예요."

일일이 답하느라 여러 번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렇구마잉. 언능 들어가 보시요."

그렇게 활기 넘치던 마을이었다.  


큰고모 내외분의 극진한 대접으로 세끼를 맛나게 먹고 광주 큰아버지댁에 들러, 친할머니와 막내 고모를 만나고 서울 집으로 올라가던 나는 개선장군의 기분이었다. 모든 일을 거침없이 해낼 것 같은 의기양양한 스물두 살의 창창이었다.




칠 년 전 이월.

그러니까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칠 년 전, 다시 무안에 들른 건 스물둘의 여름에서 서른 해가 지난 2월이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네 시간 이상 달려 아버지를 모시러 이곳에 온 것이다. 아버지는 반백 년 동안 반려자로 살아온 아내를 잃고, 순이 고모네 집에 휴양차 와 있었다.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 동무들 만나며 마음의 휴식을 하시라 했더니, 당신 집이 그립다고 예정보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겠노라 하였다. 78세의 아버지는 그때 상처받고 쓸쓸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갑자기 쇠약한 노인처럼 굴었다.


"너희 엄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우시는 아버지에 나는 일부러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버지, 오십 년 두 분이 사셨으니 남은 생은 아버지도 솔로 생활 즐겨보세요."

남은 식구들끼리 얼굴만 봐도 울고 혼자 있을 때도 엄마 생각이 나면 울 때였으나, 어쩌랴. 마음을 추스르고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야 했다.


그때만 해도 내게 남편이 있었으나 동행하기는 어려웠다. 방학이라 학원이 무척 바쁠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라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실컷 울 수 있으려면 사위가 동승하는 차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아버지를 서울 집으로 모셔다 드리려고 홀로 운전해서 내려오는 길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몇 번을 멈춰야 했는지.


면에서 고모네 집이 있는 들판이 보였다. 추억 속에서 30년 전의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음, 변함없군.'

고모네 마을로 진입하자 시멘트로 길이 닦여 있어 마을이 아주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나는 마을 어른들을 뵈면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해야 하나 어쩌나 걱정을 하며 서행하였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거리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거다. 추워서 그런가 했는데, 정말이지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거리는 물론이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빈 집들이 많이 보였다.


순이 고모 댁에 들어가 물어보니 고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돌아가시고, 요양원 가고, 자석들한테 가고 그랬쟈."

"사람이 안 사는 저 집들은 다 망가질 텐데 어떡해요?"

"할 수 없지야. 자손들도 먼 데 살아서 집 관리를 못한디야."




작년 12월.

칠 년 전보다 빈 집이 훨씬 많아졌다. 두 집 건너 한 집씩이었으니. 집 상태는 아직 멀쩡한데, 문패도 선명한데, 비어 있는 집이었다. 미남이를 데리고 다니며 마을의 빈 집을 사진으로 찍었다. (미남이가 빈 집 앞에서 용변을 보려고 하면 그러지 못하게 했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부엌이나 창고를 가까이서 보고 사진을 찍는다면 좀 더 자세한 취재가 되겠지만, 남의 집에 발 들여놓기가 쉽지 않은 데다, 오래 빈 집들이 무서웠고, 누가 뭐라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후다닥 사진 찍고 빠지고 했다. 내가 이렇게 뻥 뚫린 것만 같은 기분인데, 큰고모와 순이고모가 어떤 기분일지 걱정되었다.


빈 집의 마당에 잡초가 무성한 것도 안타까운데, 상추나 마늘이 심겨 있는 집들까지 있어서, 충격과 공포가 더 컸다. 도대체 누가 심었을까.

인심이 야박해 보이기도 하고 무정해 보이기도 했다.


고모께 여쭈니 역시 무심한 듯 말씀했다.

"친척이 허락받고 심은 거여. 땅이 아까운께."

이해는 되었다. 되었지만.

사진 속의 마당에 햇살이 쨍해서, 쪽마루에 누군가 앉아 햇볕을 쬐고 있을 것만 같아 한없이 쓸쓸했다.  


   




친언니보다 더 친하게 지낸 옆집 할머니가 작년 봄에 요양원에 들어가셨다기에, 여쭈었다.

"그 할머니 병문안 가 보셨어요?"

"한번 들러야지 들러야지 했는디 코로나가 옹께 못 갔시야. 그라고는 영 못 가부렀어."

늙어버린 마을.

산 자보다 죽은 이들이 더 많은 마을.


오늘 아침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자 고모가 양파밭을 보러 갈 거냐 물으셨다. 게이트볼로 바쁜 고모라 냉큼 따라나섰다.

"고모, 함께 어울리던 분들이 이젠 안 계시고, 집들은 하나둘 비는 것 무섭지 않으세요?"

낮에도 집에 혼자 있는 무서워하는 철이 조카는 고모가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하고 우울하고 무서울까 싶어 어렵게 물었다.

고모는 조카의 우문에 현답을 내놓는다.   


"오메 미챠븐거. 무섭긴 뭐가 무섭디야. 숨 쉬는 사람이 인자는 숨을 안 쉰다 그것뿐이제. 먼저냐 나중이냐 그것만 달른 것 아니겄냐잉."

"그래도..."

"그 집 앞에서 갑자기 내도(나도) 언젠가는 쩌그에 없겠구나 허제. 잠시여. 금세 잊어뿐당게. 게이트볼 가서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치고 막 웃고들 한당게. 그라믄 집에 와서 죽어 자 야. 그랑께 나가 건강 안 허냐."




칠 년 전 빈 집이 더 많은 마을에서 받은 충격이 내내 잊히지 않더니, 그해 가을 <감태 물든 손>이라는 판타지 소설을 썼다.

사십 대 주인공 Y가 정학당한 중학생 딸과 자신의 고향 마을에 방문하는 이야기였다. 빈 집이 많은 마을에 혼자 사는 구순의 노모를 방문하여 삼대 모녀가 화해하게 되는 스토리였다. 지금도 그 줄거리를 떠올리면 슬픔이 차오른다.


공부방까지 정리한 지난가을부터 안산에 있어도 혼자인데, 굳이 뭐 하러 집 떠나와 무안까지 가서 시골살이를 하느냐 묻는 이가 있을 줄 안다.

물리적 공간이 달라지면 사람은 바뀌게 되어 있다는 뇌과학자들의 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낯선 공간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의식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 아닐까.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하고 엄두도 내지 않았을 판타지 소설 쓰게 했던 것처럼. 


이번 무안행도 마찬가지다.

안산에서 지냈다면 <시골서 한 달, 살아볼랑가?>라는 글이 나오지 못했을 테다.

뭐든 해 보자. 무안 와서 살라는 제안을 덜컥 수락했듯이, 행동부터 하는 창창답게.

뭐든 써 보자. 무안, 순이 고모, 내가 모르는 세계가 궁금하고 이해하고 싶다면, 딱 그만큼이라도.

부끄러움은 그 다음의 일인 것을.




#무안 #시골살이

#한달살이 #빈집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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