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창창한 날들 Mar 16. 2024

자멸自滅

리뷰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열린책들, 1996)


강렬한 단편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작품이 <깊이에의 강요>이다.(분량은 손바소설이라 해야 맞겠으나.) 분량이 짧은 만큼 단순한 구성인데 읽은 지 이십 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다.


한 평론가가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젊은 여성 화가에게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이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는 며칠 뒤 신문에도 '재능은 있으나 깊이가 없다'는 비평을 싣는다.

젊은 가는 처음엔 지나쳤지만 점점 신경이 쓰여서 "나는 왜 깊이가 없을까?"하고 골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정 지어 버린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가에게는 평론가의 긍정적 평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깊이가 없다'는 말만 뇌리에 남아 자신을 후려칠 뿐이었다. 그녀는 깊이가 없다는 말을 곱씹으며 깊이를 갖추기 위해 애쓴다. 온갖 노력을 하지만 좌절하고, 결국 자살한다. 


언론은 그녀의 자살을 떠들썩하게 보도하고 그 평론가는 아래와 같이 평을 쓴다.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듯하다. (중략)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평론가에게 화가 났다. 무책임하게 지껄이는 자신의 말이 타인을, 이제 첫걸음 뗀 예술가를, 어떻게 짓밟았는지 그는 전혀 모를까. 자신의 심미안을 넌지시 드러내면서 임팩트 있는 한 마디로 뽐내고 싶었던, 무자비한 평론가에게.


뒤이어 의문이 들었다.

평론가가 마지막에 '깊이에의 강요를?'이라고 쓴 것은 무슨 뜻일까.

평론가는 '깊이가 아직 생길 때(실력 혹은 연륜)가 아닌데 깊이 있기를 바라는 젊은 화가의 욕망'을 읽은 것이 아니었을까.


처음 읽었을 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인정받고 싶어 한 그녀에게 감정이입하여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장점을 보지 못하고 단점만을 부각하고 집착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강의 능력, 학생 관리 능력이 부족한 자신 때문에 괴로워서 그랬을 것이다. 

탁월함을 바라는 마음, 그것이다.


몇 년 뒤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는 합평 모임에서 '드라마 같은 소설', '사유가 부족한 소설' 등의 평을 들었고, 숱하게 상처 입었다. 평가의 말을 곱씹었다. 

'나는 왜 사유가 부족할까? 도대체 왜 나는?'


하지만 이제는 안다. 

'도대체 나는 왜?'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빠지면 답이 없다는 것을. 

그걸로 끝나지 않고, '없는 나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간다는 것을. 

그것은 자멸의 지름길이란 것을.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사유'는 나와 거리가 먼 말일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지금 이 순간까지 쌓아온 것이 나라는 걸 인정하고 안아주는 일이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지 않겠나. 글을 쓸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사유니 깊이니, 다른 사람의 평가에 나를 맡기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자. 

나의 생각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면, 진심을 다하겠다는 자세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믿음으로.




이 책은 1996년부터 모두 78쇄가 인쇄되었다고 나와 있다. 내 책은 2021년 신판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전 세계적인 성공에도 아랑곳없이 모든 문학상 수상과 인터뷰를 거절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는 기한 은둔자이자 언어의 연금술사.

1949년 뮌헨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콘트라바스><좀머 씨 이야기>. <향수> 등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 출처 출판사 소개글에서 줄임.



#파트리크쥐스킨트 #깊이에의강요

#깊이 #예술가 #평론가

#향수 #좀머씨이야기



이전 11화 혈육이라 해서 잘 지내야 하는 건 아니지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