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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Mar 17. 2024

슬픈 날, 예쁜 추억 옷 입히기


2024년 2월 2일


올해는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칠 년째 되는 해다. 간암 말기 진단을 받은 뒤 2개월 만에 황망하게 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죄스러워서 기제사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전남 무안에서 올라오느라 운전에 진저리가 났고 쉬고 싶었지만, 한 달이나 못 뵌 아버지 뵙고 올해 상급학교 진학하는 조카들도 볼 겸 서울로 달렸다. 여동생 딸(채)은 고등학교에, 오빠의 둘째 딸(현)은 대학에 들어간다.


오빠네와 동생네 가족 모두 무안에서 귀환한 나를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금의환향 기분이 이런 걸까. 가장 늦게 참석한 나를 조카들이 선뜻 손을 내밀며 반가워해 주었다. 


채는 늘 엄마 뒤로 숨어 인사하던 수줍음 많은 아이였고, 현은 어른들을 피해 작은방에서 휴대폰만 보거나 수험생 핑계로 나타나지 않던 아이였다. 그랬던 녀석들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니 좋으면서도 뭉클했다. 학 시절 친구 문제로 많이 아파했던 채가 밝아보여서 흐뭇했고, 수험생의 피로감이 걷힌 현의 금발이 웃음처럼 빛났다.


제사 끝난 뒤 현이 내 옆으로 오더니(얘가 웬일이지?) 소주를 대작하고 싶다고 했다. 와우 놀라워라.

"고모는 소맥인디. 마셔볼랑가?"

현은 내 말투를 듣고 웃었다. 현은 말수는 적었어도 나를 보면 늘 호의적이긴 했다.

소맥을 만들어 현에게 건넸다. 현은 신세계에 입문한 것처럼 즐거워했다. 맥주 6캔이 떨어질 때쯤 내가 주종을 꾸자고 했다. 실은 하이볼이지!

"하이볼 마시자. 고모가 말아줄게."

"좋아요!"


성인이 되고 술맛에 빠졌다는 현은 "무조건 마셔보겠습니다."며 반색했다.

신이 난 나는 동생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가라고 부탁하고, 본격적으로 스무 살 조카와 술을 마시기로 했다.


소맥으로 조금은 취한 현과 나는 팔짱을 끼고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고모, 이제까지 제가 공부 핑계로 소극적이었는데요. 어른 됐으니까 가족들에게 좀 더 다가가려고요. 그동안 저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아, 고모가 고맙다.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기특한데, 솔직하게 말해 줘서 기쁘다 얘."

조잘조잘, 현이 이렇게나 깨방정 깨발랄일 줄 몰랐다.


위스키를 사는 내게 현이 비싸서 어떡하냐고 걱정했지만, 조카에게 처음 사 주는 술인데 아끼겠나.(그래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골랐다.ㅎㅎ)

탄산수 대신 사이다를 골랐고, 얼음을 샀다.


현이 하이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기분이 좋았는지 목청이 높아졌다.

"고모, 짱이에요. 너무 맛있어요."

제사 후 방으로 들어가 버린 큰조카 준이 나오고, 올케언니까지 하이볼을 처음 마신다면서 맛있다고 했다.


농담도 나누고 현이 폰으로 켜 주는 반주에 맞춰 함께 노래 부르며 새벽 1시까지 놀았다. (현과 나는 노래 취향이 제법 맞았다. 세븐틴과 방탄, 데이식스 등에 이어, 싱어게인의 소수빈, 홍이삭 등 할 얘기가 무궁했다.) 


현은 지션들의 능력과 철학, 자세 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꽤 조리있게 의견을 내놓았다. 이 아이가 이렇게 자기 생각이 분명한 아이였다고? 그동안 말을 안하니 몰랐지.

오빠네 가족과 한참 웃고 떠들다 보니 그들의 안녕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현은 나랑 여행도 가고 싶다고 했다.

오메. 이런 기특한 조카가 어딨을까잉. 최대수혜자 창창군. 조카야, 고모가 돈 좀 쓸게잉.^^


우리 곁에 함께하실 엄마께 조용히 말했다.

"엄마, 너무 많이 웃어서 미안해. 해마다 눈물부터 나는 날인데 올해는 현이랑 친해진 날이 되었네. 고마워."




2021년 5월 17일부터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거룩한 글쓰기>라는 밴드를 만들어 100일 쓰기 도전을 했는데, 구성원의 만족도가 매우 높아서 시즌 2도 열었어요.
현재 시즌 9가 39일째 순항 중이랍니다.
시즌별 15명에서 23명까지, 기존 멤버도 있고 새로운 멤버도 들어오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른바 '거글(거룩한 글쓰기)'은 치유와 연대의 공간이라 할 수 있어요. 이혼 후 매일 쓰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극복하지 못했지 싶습니다.
테마가 있고, 야심 차게 쓰는 '브런치북'도 의미가 있지만, 힘 빼고 일상을 나누는 글도 좋을 듯하여 '매거진'에 올리게 되었어요. 가볍게 읽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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