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반의 효자다. 통화는 수시로 하나 자주 찾아뵙지는 않는다. 추석에는 일을 했고, 생신과 어버이날은 용돈으로 갈음했다. 대구-부산 구간 이동 그 자체가 귀찮고, 명절이랍시고 북적대며 생활 패턴이 바뀌는 것이 답답했다. 사건 사고가 있으면 한두 번 오갈까 공식적인 본가 방문은 설뿐이었다. 연휴와 피로의 맞교환은 비합리적이지만 별 수 없었다. 엄마에 대한 내 애정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의무였다.
내게 명절음식이 의미 있을 리 없었다. 당장 떡보다 빵이 맛있었다. 떡이 더 건강한 음식이라는 것은 자민족중심주의적 발상이다. 떡도 탄수화물 압축 블록에 불과했고 빵을 따라 잡느라 요즘은 설탕도 많이 들어갔다. 명절이 아니더라도 앱 속에 무수한 명절음식들이 즐비했다. 특정일의 음식은 밸런타인데이의 초콜릿만큼 상스럽지 않아도 무의미함은 매한가지였다.
엄마에게 설은 아직도 명절이었다. 차례도 지내지 않는 집에서 연휴 전날 꼬박 음식을 준비하셨다. 5년 전쯤부터 탕국을 끊으셨을 뿐, 지금도 명절마다 무, 미역, 숙주,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나물을 무치고, 생선 서너 마리를 구우셨다. 나물이야 비빔밥으로 소비되었지만 식구 중 누구도 생선구이를 좋아하지 않아 오래 남았다. 엄마의 명절 메인 메뉴는 튀김이었다. 오징어, 새우, 고구마, 고추를 튀기고 동그랑땡, 동태, 두부를 부치셨다. 기름진 것들은 지름 1미터짜리 소쿠리를 수북이 채웠다.
나와 동생은 수년째 튀김류를 굳이 할 필요 없다며 말렸다. 제수씨와 10살도 안 된 두 조카는 얼마 먹지 않았고, 엄마는 튀긴 음식 자체를 싫어하셨다. 나와 동생은 체중 관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장성한 두 아들놈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안 먹을 수 없어서 끼니와 끼니 사이에 수시로 튀김을 주워 먹었다. 엄마는 아들들이 먹는 튀김을 끊지 못하셨다. 엄마 때문에 살찐다고 하면, 그런 살은 금방 빠진다고, 명절인데 명절 냄새는 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엄마의 말은 퇴락한 유적지에 홀로 남은 돌기둥을 쓰다듬는 잔바람처럼 허약하고 쓸쓸했다.
명절 냄새, 같은 말로 엄마가 당한 노동 착취의 체취다. 내 유년 시절, 엄마는 보잘 것 없는 집안의 큰며느리로서 지금의 너덧 배를 튀기고 부치셨고, 더 많은 음식에 개입하셨다. 손맛 좋은 죄였다. 연휴 첫날에는 엄마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시대가 그러했다. 아마도 엄마는 당신 새끼들 먹인다는 생각으로 버티셨을 지도 모른다. 그래야 명절이 명절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여전히 그 명절 속에 멈춰 계셨다. 낡은 돌기둥이 건물의 시절을 추억하듯 엄마의 명절은 반드시 내 새끼 먹일 음식 만드는 날로 완수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나는 더 변했다.
엄마가 만든 명절은 절반 이상 남았고, 그것의 절반은 내 몫이었다. 다른 밑반찬까지 추가 되었다. 내가 갖고 갈 음식을 쌀 때, 엄마는 내 자취방 냉장고 크기와 내가 삼시세끼를 집에서만 먹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잊으셨다. 냉장고 안에서 반찬통 테트리스를 하고 나면 문이 겨우 닫혔다. 속이 찬 만큼 냉장 능력도 떨어지는 듯했다. ‘쉬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과식이 가속되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을 자기 손으로 버리는 일은 누구나 난감할 것이다. 데면데면한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온종일 분주한 엄마와 아침저녁으로 싱크대에서 뚝딱뚝딱 대는 뒷모습의 엄마를 기억하므로 나물을 씻고, 다듬고, 데치고, 무치는 수고로움을 외면할 수 없다. 더군다나 더 주고 싶어도 늙은 육신으로는 그런 수고로움밖에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모정에 비하면 먹어 없애는 수고는 수고도 아니다. 명절의 끝에서 명절음식 없애기 타임 어택 게임이 시작된다.
자취의 밥상에서 명절이 연장된다. 식사는 무조건 꼬막 비빔밥이다. 꼬막무침은 엄마만의 명절음식이었다. 언젠가 한 번 내가 해달라고 한 이후 명절음식 멤버로 고정되어버렸다. 조갯살로만 내 주먹만 한 반찬 통에 꾹꾹 채워져 있어 방심하고 몇 끼 거르면 어느새 쉬었다. 나물 역시 빨리 쉬어 많이 넣다 보니 내 비빔밥은 꼬막을 쏟아 부은 특식 여물에 가까웠다.
끼니와 끼니 사이에 튀김을 먹었다. 혼자 먹어야 해서 더 성실히 먹었다. 밥이나 면이 아닌 것은 끼니가 아니므로 우리 동네 분식집 기준 7,000원어치를 먹어도 간식이었다. 튀김을 먹을 때 콜라 대신 식혜를 사발 단위로 마셨다. 간식과 간식 사이에 과일을 먹었다. 먹는 것이 본업인 사람처럼 먹기 위해 똥을 싸댔다. 생선구이와 떡은 냉동실에 얼려둬서 다행이었다.
잡탕이나 찌개를 끓일 수 없는 자취생에게 라면은 든든한 아군이었다. 라면은 이 세상 대부분의 식재료를 포용했다. 나물, 꼬막, 튀김은 오히려 라면 맛을 양껏 끌어 올렸다. 내 비록 비만인이어도 야식으로 라면을 먹지 않았지만 명질 직후만큼은 예외로 했다. 꼬막이 상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벌교에서도 시도하지 않을 만큼 라면에 때려 부어 이번에는 꼬막찌개에 사리를 추가한 꼴이 되었다. 스프를 덜 넣고 팔팔 끓이면 갖이 맞았다.
냉장고 속엣 것들이 내 내장 지방으로 삼투되는 것은 명절의 과학이었다. 매년 이 기간에 1~2kg씩 불었다. 사나흘 간 똥으로 정산되지 않는 순수 체중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삼투압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내 내장 지방 쪽의 칼로리 농도가 더 진했다.
아이고, 우짜면 좋노. 니가 우야다가 이래 됐노. 우리 아들 장가는 다 갔네.
엄마는 무덤처럼 부푼 내 배를 내가 당신의 질병사를 따라 가리라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고혈압과 심혈관계 질환을 앓고 계시다가 최근 당뇨 가능성이 위험 경계선까지 치솟았다. 나 역시 혈압이 높았고, 최근 콜레스테롤 수치까지 좋지 못했다. 엄마는 연휴 중에 튀김 갖다 먹으라는 말씀도 못 하시다가 더 이상 튀김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나는 자취 후 처음으로 튀김을 갖고 오지 않았다. 생선 구이, 떡, 식혜도 생략했다. 나물, 김, 말린 비트, 김치, 더덕무침, 꼬막무침은 평소의 절반 정도만 갖고 왔다.
내가 배를 쓰다듬으며 임신했다고 하니 갓 7살 된 작은 조카는 곧이곧대로 들었다. 나는 4월 출산이라고 했고, 아들인지 딸인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조카는 내 배에 귀를 대며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져 본 적 없는 내 딸 이름을 ‘시은’이로 작명해줬다. 혹시라도 아들이면 ‘시안’이라고 했다.
명절 이후 3주가 지나는 동안 2kg 이상 감량했다. 물이 많을 때 빨래가 잘 짜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을 자전거로 달리면 4월이 끝날 무렵이면 시은이와 시안이를 모두 출산할 수 있을 듯하다. 애초에 가져서는 안 되었을, 나태와 자기 방관 사이의 사생아 엔딩을 확신한다.
다만 엄마의 명절을 내 마음대로 바꾼 것이 마음에 걸린다. 시대가 변했다고 엄마도 변해야 한다는 당위는 변할 수 있는 것들의 아집이다. 그래서 내년 설에는 중년의 아들이 아귀찜과 낙지볶음을 해달라고 조를 예정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종종해주셨고, 엄마가 잘하시는 음식들이다. 이기적인 것 같지만, 엄마는 당신 손으로 만든 명절 속에서 사셨으니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엄마 명절의 최소한이다.
혹은 엄마가 기억하는 내 몸으로 돌아오면, 튀김을 요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안녕일지 다시 안녕일지 두고 볼 일이다. 언젠가 진짜 시은이나 시안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