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기 위해서는 노화가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노화는 늦출 수 있어도 막을 수 없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삶의 보편 양식이다. 1번 지지자와 2번 지지자,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남자와 여자도 노화로 귀결된다. 노인들은 처음 만난 사이에도 질병, 통증, 약, 병원을 소재로 쉽게 말문을 튼다. 노화하는 한 모든 인간은 연대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딱 그거 하나다. 누구를 만나든 아픈 이야기가 통한다. 날씨나 가십으로 스몰토크를 나누는 것보다 인간적이어서 더 빨리 밀착된다.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나이 마흔 넘은 사람들은 후식으로 약봉지 하나씩은 달고 산다. 최소한 영양제라도 먹는다. 친구들을 만났을 때 아픈 이야기 빈도가 점점 늘어난다.
나는 보험에 들지 않았다.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정상 체중을 유지하고 있으니 중병에 걸릴 유인이 적었다. 부모님 모두 고혈압이지만 가족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술, 담배에 의한 것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의한 것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다양한 1588들에게 나는 물을 것도 따질 것도 없었다.
외모는 20대보다 조금 낡았다. 체력도 떨어졌다. 분노조절장애를 겪던 똘똘이는 어지간한 일로 분노하지 않더니 점점 새벽에도 침착한 날이 많아졌다. 체중이 불며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지만 컨디션이 나쁜 것쯤으로 여겼다. 회복되지 않는 컨디션은 갑자기 노화로 종합되었다. 나는 작년에 노화 부스터샷을 맞았다.
10여 년 전에는 조금 불편하다 저절로 사라졌던 족저근막염이 다섯 달째 이어졌다. 과민성 방광은 약을 먹어도 개선되기는커녕 이제 밤마다 깰 지경이다. 눈이 침침해졌고, 뜬금없이 몸살(코로나는 음성이었다)이 났고, 사타구니에 엄지만 한 종기가 솟았고, 자고 일어나니 어깨가 아파 팔을 들어 올릴 수 없거나 손아귀가 아파 주먹을 쥘 수 없었고, 처음으로 구내염을 앓았다. 큰 병은 아니지만 서너 달 간 자잘한 통증들이 줄줄이 이어져 약이 끊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냥 뒀을 증상에 이제는 꼬박꼬박 병원에 갔다. 몸도 약해졌지만 아프면 바로 병원을 떠올릴 만큼 마음도 약해진 것이다.
확실히,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몸은 죽음으로부터 대여한 중고다. 죽음은, 유튜브처럼 처음에는 몸을 공짜로 이용하게 하다가 조금씩 비용을 청구했다. 몸의 품질을 점점 떨어트리면서 대여비는 더 비싸게 받아먹는 갑질은 점점 심해졌다. 인간은 이 불합리를 감수해야 했다. 병원비로 돈과 시간이 소모되었고, 운동에도 시간을 들여야 했다. 돈도 사실은 시간을 들여 버는 것이므로 죽음이 우리에게 청구하는 시간 비용은 악랄했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화와 싸워야 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을 내가 기억하는 정상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약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채소 섭취량을 늘렸다. 채소를 데쳐 놓고 매끼 비빔밥을 먹거나 쌈밥을 먹었다. 라면은 건면으로 바꾸면서 끓일 때 대파 하나를 썰어 넣었고, 김치 대신 양파나 채 썬 양배추를 먹었다. 밥을 한 숟갈 줄인 만큼 버섯으로 채워 포만감은 일정하게 유지했다.
그리고 즙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치료비로 소모한 돈이 노동 투여 ‘시간의 즙’인 만큼 내게 필요한 초록색 양분의 농도를 높여야 시간의 균형이 맞을 것이라는 1차원적 생각이었다. 영양제나 건강 보조제도 같은 도식을 따르지만 물처럼 마실 수 있는 즙과 달리 약처럼 느껴져 배재했다.
시작은 도라지배즙이었다. 말로 먹고 사는데 말만 하면 잔기침이 나왔다. 병원을 다녔지만 신통치 않았다. 강의가 불가능할 정도라 밥줄 끊길 걱정이 들었다. 도라지가 목에 좋다는 말은 민간요법 같았고, 민간요법은 미신 같아서 신뢰하지 못했지만 이미 궁지에 몰려 있었다. 밑져야 본전의 기분으로 도라지배즙을 먹었더니 내 걱정이 시시해지리만치 효과가 좋았다. 안도했으나 씁쓸했다. 더 이상 내 기관지는 독립적 기관이 아니었다. 인공심장처럼 도라지배즙 배터리가 없으면 제기능을 못하는 고물이 된 셈이었다.
즙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후 양파즙도 복용하기 시작했다. 혈압약에 입문한 이후 1년 만에 약의 강도를 한 단계 높였다. 나보다 5살 더 많아져버린 혈관 관리도 필요했다. 싱크대 개수대 배수로에 진득하게 낀 물때를 보면 내 혈관 상태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부디 도라지배즙처럼 효과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당근마켓에 ‘도라지’, ‘양파’, ‘즙’을 키워드 알림 설정을 해뒀다. 기존의 ‘카레’, ‘라면’, ‘스팸’을 지웠다. 도라지즙은 드물었지만, 도라지스틱은 간간히 나와서 저렴하게 구해 먹었다. 최근에는 아예 도라지청을 샀다. 양파즙도 간간히 저렴하게 나왔다. 흑마늘즙이 동일 제품 인터넷 최저가 대비 절반도 안 되는 값에 나왔기에 허겁지겁 샀다. 사고 나서 검색해 보니 고혈압에 좋다고 해서 뿌듯했다. 뿌듯해서 또, 씁쓸했다.
즙이 뒹굴던 풍경을 기억한다. 중고교 시절, 냉장고 야채 칸에 포도즙이나 양파즙이 쌓여 있었다. 먹으려고 꺼내놓은 것들이 식탁구석, 침대 옆, 티비 위 등 집안 곳곳을 나돌아 다녔다. 피로회복과 혈관 건강에 좋다며 챙겨 먹으라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잔소리에 못 이겨 포도즙은 주스 같아서 먹는 흉내는 냈지만 양파즙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밥 잘 먹는데 군더더기 영양분을 체내에 투입하는 비효율을 이해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엄마 나이를 따라 잡은 나는 엄마를 완벽히 이해했다. 엄마도 밥으로 보전되는 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근마켓에 ‘정관장’도 알림 키워드로 추가했다. 명절은 스팸만큼은 정관장도 제철이다. 지난 추석 전후로는 스팸 서른 개 남짓을 수확했는데, 이번 설에는 정관장을 얼마나 수확할지 기대된다. 이번 수확물은 엄마 몫이다. 엄마의 몸은 사과, 포도, 양파, 양배추, 호박 같은 저렴한 배터리로 충전되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내게 즙을 종용했듯이 이젠 내가 엄마에게 홍삼을 물릴 차례다. 10년 후쯤은 나도 필요해질 것을 예감한다.
혼자 살면서 아프면 서럽다는 것은 자취 하수들의 어리광이다. 앓아누웠을 때, 자다 깨기를 반복하거나 누운 채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옆에 누가 있든 말든 상관없다. 오히려 아무도 없어야 마음껏 허술할 수 있어 편하다. 진짜 서러운 것은 늙음을 나눌 수 없는 것에 있다. 오롯이 혼자 늙어 가는 것, 문득 늙어버린 나를 깜짝 목격하는 것, 닥쳐오는 죽음을 혼자 대면해야 하는 것은 시간이 먹고 버린 찌꺼기로 나를 자각하는 일이다.
오래된 자취는 위험하다. 시간의 속도는 내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로 체감되므로, 혼자는 늙음을 모른다. 그래서 늙어버린 몸이, 내가, 낯설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고, 아프고 치료하고 운동하느라 죽음에 시간을 상납하고 나면 가용 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다. 이제는 그 시간을 알뜰하게 쥐어짜야 한다. 시간의 즙을 마시고 싶다. 내 시간의 즙은 도라지배즙처럼 너의 이름과 함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