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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Aug 14. 2023

배달앱 속 찌질한 다크나이트

갑질을 겨눈 오지랖이었다. 배달 앱에 별점 테러 남긴 것들이 꼴 보기 싫었다. 힘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은 자기가 가진 힘의 크기를 모르는 듯했다. 인간 값 빼고 모든 것이 인플레이션 된 시대, 별점 1은 평가라기보다는 악의였다. 1은 자영업자의 목구멍을 겨눈 칼끝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저 못난 것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헤살 놓는 내 악의다. 배달 앱에서 별점 순으로 식당을 정렬한 후 스크롤바를 한참 내렸다. 이 낙폭에 담긴 암담함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함과 무심함은 다르지 않았다. 악귀(惡鬼)와 아귀(餓鬼)도 다르지 않았다.


아직 별점을 받지 못한 가게는 제외했다. 퇴마(退魔)가 주목적이었고, 의도가 어떻든 5점짜리 호의는 별점을 받으려고 꿈틀거린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 도보 거리에 별점 3.8점짜리 해물찜 집을 찾았다. 무려, 1인분도 팔았으므로 존재 자체가 호의였다. 그 식당이 지금까지 받은 별점은 5-1-4-5-4였다. 1점짜리 소비자는 아귀가 익지도 않았고, 비린내가 너무 나서 먹지 못하겠다고 했다. 본인 입에 맞지 않는 아쉬움을 ‘감히 나에게 이런 음식을 대령했느냐’는 자의식 과잉과 결합되어 과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음식점이 존재할 리 없었다.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한 번의 실수가 영원히 박제되어 현재를 발목 잡게 만드는 이 별점 시스템도 빌어먹었다.


1점 받은 날 자영업자의 밤을 생각했다. 하루는 정산되지만 피로는 정산되지 않는 잠자리에서 앱에 올라온 1점짜리 별점을 보았을 때, 본인도 모르게 흘러나온 숨은, 아직 남아 있는 삶의 기척인지 성큼 다가온 죽음의 기력인지 더듬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밤 자영업자는 칼끝에, 리뷰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상대의 악의를 조언으로 애써 포장하며 눈웃음 이모티콘까지 붙였다. 스마트폰을 끄고 천장의 어둠을 마주하며 눈을 끔뻑끔뻑하는 얼굴을 떠올려 보면, 1점짜리들, 네깟 게 뭔데.


해물나라에 아귀찜 1인분을 주문했다. 정가 16,000원, 쿠폰 써서 14,580원이었다. 내 주력 치킨 BHC 레드킹은 쿠폰 써서 13,670원이니, 그보다는 나아야 했다. 우리 엄마도 아귀찜을 팔아 봤으니, 그보다도 나아야 했다. 외식의 존재 이유는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맛의 경지에 있었다. 나는 ‘맛있다’의 허들은 낮은 편이지만 엄마가 해줬던 음식들만 못하면 맛있음의 절대량과 무관하게 외식할 이유가 없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딱 아귀찜이었다. 돈 아깝지는 않았지만 우리 엄마의 승리이므로 외식 가치는 없었다. 3.8은 적정 점수였고, 별점인플레이션을 반영해 보정하면 4.5까지는 괜찮을 듯했다. 그래서 5점을 줬다. 최종 별점 4점이 되었다.


리뷰는 가성비 높은 글쓰기다. 아무리 대충 써도 진지하게 읽어줄 독자가 최소한 1명은 확보된다. 진지하게 써서 울림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테러범들에 대한 응징도 응징이지만, 당신이 하루를 정산하는 밤 내 글이 마음의 순익으로 산술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난감했다. 5점에 걸맞은 리뷰를 쓰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사장이 거짓 희망에 도취되어 현실을 오독할지도 모를 것을 우려했다. 나는 내 짧은 글이 누군가에게 짧은 기쁨으로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힘이라도 되어 현실을 열어주는 데 실질적 보탬이 되고 싶었다.


사실, 시작부터 싸했다. 해물나라가 있어야 할 주소지에 2층 양옥을 개조한 1층에 형제 도시락과 싱싱푸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전화하니 가게 안에서 전화 속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배달 앱에 여러 상호를 내걸고 육회와 도시락을 주력으로 이것저것 파는 듯했다. 아귀찜은 간판과 시트지를 붙인 벽면 유리에 주장되지도 않았다. 식재료 순환이 더딜 것이므로 신선도를 포기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부엌이었다. 왼쪽에는 화구, 오른쪽에는 조리대, 안쪽은 문이 트인 방이었다. 주인 내외가 헐레벌떡 나왔다.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부부였다. 1점의 밤을 상상했던 그 얼굴이었다. 단단해진 승모근으로 짓는 미소가 부착되어 있었다. 덕분에 가게의 기형적 구조는 탐욕이라기보다는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으로 읽었다. 인근에 임대 나온 카페 월세가 30만 원인 동네였고, 배달 가능 시간은 오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였다. 내 리뷰에 달린 사장님 댓글을 확인하려다가 아침 7시, 새벽2시에 배달 가능을 확인했다.


나는 아 다른 것을 어 다르게 썼다. 빛깔이 거무튀튀한 것은 인공색소가 들어가지 않은 건강한 것으로, 싱거운 것은 담백한 것으로, 덜 매운 것은 매움의 뒤끝이 깔끔한 것으로 바꿨다. 쓰고 보니 거짓말은 아니어서, 내가 지나치게 다크하게 살아 온 듯했다. 긍정 위에 4인분 같은 1인분이라 밥하기 귀찮은 1인 가구에게 적절하다는 사실을 내려앉혔다. 조금만 부지런해서 양념장에 콩나물 추가해 볶아 먹으면 2끼는 더 건질 수 있으니 절대 가성비였다. 가성비는 취향이었다.


그만하면 당신에게 가문 땅에 단비였을 것이니 그에 맞는 반응을 기대했다. 시혜적 호의를 증명 받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지만 욕심보다는 인지상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사장님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1점짜리 댓글에도 깍듯하게 대답하던 곳이므로 나는 제대로 언짢았다. - 감히 내 글에 이따위로 대응한다고?


댓글 삭제는 거의 확정했다. 간절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사람을 돕고 싶지 않았다. 배달앱으로 장사하면서 댓글 관리하지 않는 것은 납득되지도 않았고, 납득되지 않은 것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호의와 감사를 상호교환하며 인간성을 충전할 계획을 망쳤으므로 응징을 고민했다. 애초에 내 행위 동기는 악의였다. 3일 연속 주문한 후 1점짜리 3개를 남기면 2점대로 만들 수 있었다. 외진 동네에서 2점대는 회복이 힘들 것이다. 이견도 참지 못하고 짓눌러야 직성이 풀리는 MZ의 첨단에 내가 있었다. 나는 테러범과 동족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보복도 하지 않았다. 기존 5점을 삭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알찜을 한 번 더 주문했다. 그리고 그날, 포장 받으러 가서 댓글이 달리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유리벽에 점포세를 알리는 A4지가 붙어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 45만 원, 시설비로 1,500만 원을 요구했다. 주택가 가장자리에서 그 비용을 치를 사람이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가게도 의아했고, 사장님 내외의 다음 밥벌이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별점 5점을 달았다. 최종 별점은 4.1로 올라갔다. 이제 내 리뷰가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작은 긍정 하나 남겼다. 그리고 해물나라에 발을 끊었다.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자포자기의 장사 중이지만, 내 리뷰는 끝까지 호응 받지 못했다. 영업을 마친 당신의 밤이 잠시 따뜻했다면 그래 뭐 되었다, 할 만큼 나는 관용적이지는 못하다. 점포세는 인과응보다. 내게 대답 한 마디, 그게 그리 어렵나.


옹졸한 다크나이트는 다음 타겟을 노리는 중이다. 어차피 삐뚤어진 자의식 과잉 종자들은 널렸다. 나의 동족들에게 묻고 싶다. 이왕 자의식 과잉을 표출하려면 내가 조금 더 멋있지 않았나? 네들이 이 맛을 아냐? 무례하고 멍청한 것들, 너희들 의도 따위 먹어서 막아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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