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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n 07. 2024

파프리카는 과일이다

“한 입 드셨으면 사셔야죠.”


마녀가 꽂은 자본주의의 비수였다. 백설공주는 독살된 것이 아니라 사과 가격 듣고 까무라친 것일지도 몰랐다. 내 주먹보다 작고 윤기도 나지 않는 사과가 다섯 개 11,000원이었다. 큼지막한 배는 두 개 12,000원이었다. 예감했던 일이 예감한 만큼 벌어지는 중이었다. 과일은 사치품이다. 한 송이 12,000원짜리 샤인머스켓 앞에서는 저절로 여우가 되었다. 저 포도는 셔서 맛 없을 것이다.


수박은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고 덩치를 키웠다. 1인 가구가 다수 가구인 시대, 수박 크기는 냉장고가 감당하기 힘들어 유감이었다. 어차피 물기 머금은 껍데기 쓰레기는 금방 쉬어 냄새 나므로 자취생활의 민폐다, 라고 새로운 신맛을 만들었다. 수박은 18,500원이었고, 우리 동네 시장 통닭 한 마리는 9,000원이었다.


사회적 문제로서 비만을 다루며 중학생들에게 집에 과일이 있는지 물었다. 모든 학생들이 오렌지, 참외 정도는 있다고 했다. 가정에 따라 샤인머스켓이나 토마토도 있었다. 수성구 거주민도 과일을 못 먹을 정도면 국가 경제 근간이 흔들리는 것일 테니 다행이었다. 나는 없었다. 집에 과일이 있는 것이 당연한 학생들은 집에 과일이 없는 당연함을 몰랐다. 그러나 이들도 사과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무 명 안팎 가운데 한두 명만 있었으니 과연 애플이었다. 시총 3조 달러에 육박한 존재감은 현실감이 없었다.


내 학생들의 표본에서 비만은 한 명으로 약 5%에 해당했다. 한 명을 제외하면 BMI 기준 경도비만은커녕 과체중도 없었다. 수치상으로 비만인 학생은 사실 근밀도가 남달랐고 현재 식단 중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체중과 표준 사이에 분포했다. 엄마들이 인스턴트식품을 통제한 덕분이었다. 라면조차 일주일 혹은 한 달의 행사인 집도 있었다. 2022년 학생 건강 검사에 따르면 청소년 비만율은 18.7%였다. 소득이 아이들 몸에 반영되는 통계도 자본주의적이었던 것이다.


내 몸은 내 소득을 반영하지 못했다. 증가 소득은 외식물가만 충실하게 수용했다. 과일은 허기를 채우는 기능과 상관성이 약해서 카트에서 쉽게 이탈했다. 방구석에는 조금 더 비싼 탄수화물과 지방만 응집했다. 2022년 18kg을 감량해 표준에 들었다가 2023년 차근차근 리바운드해서 현재 경도비만에 이르렀다.


소득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가 없기 때문이다. 1인 가구가 절대다수인 우리 동네는 배달 오토바이가 분주했지만, 수성구 아이들은 배달 음식도 한 달 중 기억할 만한 밥상 행사였다. 우리 엄마도 반찬을 택배로 보낼 때 꼭 과일을 섞었다. 내가 여기서 구매하는 게 더 저렴한데도 엄마는 비효율성을 고수했다. 엄마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저항해 자식들 건강을 보존했던 것이다.


엄마를 떠올리고 나니 우리 동네 마트에 품었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마트에는 늘 신선한 과일이 있었다. 10년 넘게 매대를 넓게 차지하고 있으니 팔리는 모양이었다. 20만 원대 월세가 빼곡한 동네에서 누가 ‘무려’ 과일을 사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엄마들인 듯했다. 1인가구들 사이에도 간간히 가정집이 있었다. 어린이집 차가 돌아 다녔고, 간혹 놀이터를 뛰노는 아이들을 보곤 했다. 혹은 식생활을 엄마의 자장에서 유지하는 대학생들이나 취준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일을 먹지 않는 것은 엄마 없는 티 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는 과일은 우리 엄마의 명예다. 그래서 과일을 사러 마트에 간 것이었다.


습관은 힘이 셌다. 큰맘 먹었지만 ‘감히’ 사과, 배, 포도는 살 수 없었다. 과일 구매 심리저항선은 외식 한 끼 가격보다 조금 낮았다. 단, 그 가격에 3회 이상 나눠 먹을 수 있어야 했다. 과일이라고 적게 먹는 것은 아니어서 단위 포장 당 사과와 배는 2회, 포도는 1.5회로 산술되었다. 그러고 보니 올 봄은 딸기 없이 어영부영 지나갔다. 딸기는 2~3회로 조금 애매했었다. 토마토와 참외 심리 시세는 딸기와 비슷했기에 이번에는 사려고 했지만, 다 팔리고 없었다. 가장 만만한 바나나는 덜 익은 것들 뿐이어서 당장 먹기 단단했다.


바나나 한 송이 사려고 다른 마트에 가자니 귀찮았다. 어떻게든 과일을 해결 보고 싶어서 엉뚱하게 귀결된 결과가 피망이었다. 사과만 한 피망은 6개 3,500원이었다. 초록색은 과일일 수 없고, 피망은 실제로 고추를 개량한 채소지만 그냥, 마, 니 오늘부터 과일해라, 그런 기분이었다.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가 피망보다 더 과일 같았지만, 먹는 것은 낮은 단계에서 시작해, 물리면 그때 올려 가면 되었다.


내 세계에서 채소와 과일은 단독 식용 가능성으로 구분되었다. 채소는 요리 재료로서 다른 식재료와 적극적으로 어울렸고, 과일은 자기 주장이 강해 다른 식재료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피망과 파프리카는 피자나 잡채에 색깔로 존재하는 고집불통이었다. 요리를 잘 모르는 덕분에 피망을 과일 취급하는 것에 저항감은 적었다. 무엇보다도 아삭아삭한 질감과 풍부한 즙은 과일이 아닐 이유 없었다.


씻어서 생으로 먹었다. 껍질이 두꺼워 씹는 맛도 좋았다. 엄마 명예를 생각해서 며칠 후 파프리카로 급을 높였다. 3개 3,000원이었다. 피망보다 과체가 탄탄하고 조금 더 달달했다. 색깔부터 사과를 넘어서 초과일적이었다. 과일 섭취 이유가 비타민, 식이섬유 섭취와 달달한 맛에 있다면 파프리카는 괜찮은 대안이다. 시세 따라 다르겠지만 개당 1,000원, 20~30칼로리, 한 번에 열 개씩 먹을 수 없으니 확실한 다이어트 식품이다.


백설공주가 한국 동화라면 사과는 이제 파프리카로 바뀌어야 한다. 건강, 그래 좋다, 파프리카 속에 플레인 요구르트를 채워 먹었다. 요플레에 들어간 것은 복숭아, 딸기 같은 과일이므로 내 파프리카는 기능성 과일이다. 이건 내가 엄마에게 전수해줘야겠다. 모전자전, 엄마도 살 빼는 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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