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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n 14. 2024

새벽빛 다이어트 고깃굿, 재첩

삶의 무게가 머리 위에 출렁거렸을 것이다. 정수리에 집중된 무게는 아팠을 것이고 흔들리는 무게 중심에 몸이 휘청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게를 비울 때까지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0년도 넘은 유년의 동네 풍경 속에서 새벽의 잠꼬대가 느리고 나른하게 늘어졌다. 재-첩국 사이소.


국물의 깊이가 아니라 건더기 질감만 먹던 시절, 재첩국은 콩알만 한 조개가 간신히 남은 허공의 국물이었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허공이라도 쥐어짜야 하는 간절한 먹거리를 빈곤으로 이해했다. 종종 물에 밥말아 먹었기에 간이 밴 물밥은 우리집 식탁에 어울렸다. 빈곤이 빈곤인지도 몰랐고, 맛에 호불호도 없었기에 잊혔다. 내 밥상이 엄마손을 떠나면서 재첩국은 자취를 감췄다. 20대의 대학생도, 30대의 자취생도 물기가 아니라 건더기가 필요했다. 어차피 재첩국 파는 식당도, 마트도 없었다. 본가에 가더라도 엄마는 오랜만에 온 아들에게 재첩국을 내진 않았다.


내게 재첩국은 섬진강 근처의 지역 특산품이었다. 6시 내 고향에 서식하는 사회적 사실은 대구에서 멀었다. 6시 내 고향을 챙겨 본 적 없듯, 아, 그런가 보다, 알 바 아니었다. 엄마가 재첩국 사러 새벽시장인가 무슨 시장에 갔던 일만 아슬아슬하게 기억에 매달려 있을 뿐, 재첩국은 내 정서를 건드리지 못했다. 내 생활권에서 멸종한 이야기는 아쉽지 않았다.


재첩국이 갑자기 내 생활권에 틈입한 것은 알리 때문이었다. 알리는 한국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 한국 상품을 특가에 뿌려댔다. 동일제품이 타 사이트보다 압도적으로 저렴할 때, 내 취향이었다. 마침 다이어트를 계획 중이었다. 재첩국 5kg을 주문했고, 다 먹기 전, 특가 행사가 끝날까봐 5kg을 더 주문했다. 냉장고가 가득 차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냉동실을 가득 채웠다. 비워낼 자신 있었다. 40대는 허공을 쥐어 짠 국물 맛을 알았다. 시간의 밀도가 떨어진 나이와 허공국물은 잘 어울렸다.


공기밥 330칼로리, 재첩국 250g 15칼로리, 부추 및 김치 몇 칼로리 추가하고 밥 한두 숟갈 더 먹어도 한 끼 400칼로리가 안 되었다. 칼로리의 사실은 포만감에서 죄의식을 도려냈다. 믹스 커피 한 잔 마셔도 될 권리를 획득하지만, 권리를 쓰지 않는 것으로 자부심을 소박하게 적립해 나갔다. 여기에 맛의 사실이 호(好)호(好)호(好) 더해졌다. 국물의 깊이가 몸속에 내렸다. 뜨거운 국물의 시원함을 몸으로 이해한다면 재첩국을 시작할 나이인가 보았다. 나는 아침에 시원했고, 가끔 자기 전에 바나나 한두 개와 뜨끈하게 시원했다. 바나나를 녹이듯 씹어 물크러진 달달함에 재첩이 우러낸 뜨거운 짠물을 섞으면 자극없는 단짠단짠으로 하루가 토닥토닥 갈무리되었다.


먹고 보니 일관성 있는 취향이었다. 나는 국밥에 양념을 풀지 않았다. 복국에도 양념을 덜어냈다. 잔치국수나 냉면을 먹을 때도 양념장을 안 풀거나 적게 풀었다. 빨간맛의 균형은 김치로 맞췄다. 라면이나 짬뽕을 먹을 때 김치를 먹지 않았고, 국물을 남겼다. 빨간 국물의 묵직한 칼칼함보다 맑은 국물의 가벼운 담백함을 좋아한 것이다. 충분히 산술될 수 있는 취향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은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재첩국이다. 재첩국은 자기 주장이 약했다. 단짠단짠, 맵맵맵, 자극을 극단으로 몰아치는 음식들은 입으로 침투해 들어와 음식 중심의 물아일체를 강제했지만, 재첩국은 특유의 맑고 연한 빛깔로 내게 천천히 스밀 뿐이었다. 아마도 산신령의 음식이었다.


밍밍하거나 비릴 여지를, 부추가 막았다. 농구장의 마이클조던, 축구장의 메시, 로스트 템플의 임요환, 재첩국의 부추였다. 부추가 들어가면 재첩국이 아삭아삭 산뜻해졌다. 재첩국은 부추가 자아실현되는 유일한 방법이고, 부추는 재첩국이 완성되는 최후의 방법이었다. 마트에 부추가 떨어졌을 때 미나리를 대신 넣어 봤지만 상성이 맞지 않았다. 부추전이나 부추만두도 만만찮은 부추의 최댓값이지만 파, 배추, 미나리, 김치 등 대체제가 많아 부추의 유일성이 상쇄되었다. 서로를 최댓값으로 맞춰주는 합의를 ‘재첩국’으로 명명하는 것은 부추에게 부당해 보이나 단독으로 존재 가능한 주연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라 별 수 없다.


재첩국을 먹을 때 부추를 조금 과하게 넣었다. 다이어트 하며 탄수화물 줄이며 채소섭취를 늘린 탓이다. 나물을 제외하면, 한식에서 채소는 주로 빨간맛과 연합했으므로 하얀맛에 실린 초록의 기회를 알뜰하게 활용해야 했다. 재첩국의 육질은 조갯살이 아니라 부추살로 씹혔다. 소화기와 순환기가 약한 내 체질에 재첩국은 딱 떨어졌다. 부추살이 초록의 생명력을 충전해주는 듯했다. 야식으로 국 한 사발 끌렸던 것도 생존본능이 감지해낸 내 살의 정답이었던 셈이다.


냉동실을 빽빽하게 메운 재첩국을 보고 있으면 엄마에게 미안했다. 내 냉장고의 원주인은 멀리서 택배로 내 밑반찬을 살피는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재첩국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엄마는 한끼 먹을 재첩국을 하려면 2~3000원 든다고 했다. 엄마가 들일 손품, 택배비 생각하면 사 먹는 게 나았다. 택배로 주문하면 한 끼 1,600원 들었다. 세상 참 좋아진 것이 엄마의 필요를 상쇄하는 방향이라면 그게 정답일지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어 두었다. 지금 가성비 좋은 다이어트 끼니를 발견했다.


엄마는 그래도 엄마가 만들면 국물이 더 진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엄마는 최선을 먹이고 싶으시겠지만, 나는 엄마가 재첩국을 짊어지고 새벽 골목을 걷는 모습을 떠올리기 싫었다. 나는 부추가 더해진 가성비면 충분했다. 그런데 당신이 왜 시무룩해지시는데. 반격했다.


“엄마도 드셔 볼래요?”

엄마는 재첩국이 싫다고 하셨다. 그리고 재첩국 아줌마는 재첩국이 좋았을까? 골목길 어두운 허공에 재첩 한 알 같은 존재감으로 걸었을 것이다. 고단함 끝에 희붐해지는 새벽, 재첩국은 그 새벽의 빛깔로 30여 년간 착실히 낡아온 내 몸에 스민다. 나는 재첩국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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