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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l 18. 2024

독후감대회에서 보는 수성구 vs 비수성구

입시의 비극은 글쓰기를 표현으로 오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글쓰기는 사고의 총체다. 글을 못 쓰지만 성적이 좋은 학생은 거품이다. 성적은 낮지만 글을 잘 쓰는 학생은 저평가우량주다. 시대는 더이상 시험 잘 치는 능력을 선호하지 않는다. 비선호를 향한 맹목적 최선은 ‘교실 이데아’를 부를 자격이 없다. 이제 그런 내신타령 됐다.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조금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대구 지역 도서관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독후감 대회가 있다. 1등 5만원의 작은 대회지만 대구교육감상이 학교로 전달되어 수상 결과가 학생부에 기록되는 걸로 알고 있어 소소할 수 없는 대회다. 초등부, 중등부 각각 25-30명 수상자를 내기 때문에 학생에게는 ‘어쩌면 나도?’ 가능성의 대회이기도 하다. 나는 학생들의 성취동기를 자극하는 용도로 이 대회를 활용한다.


글쓰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주도성이다. 국영수 공부는 집중력이 떨어지면 학습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남는 게 있겠지만, 글쓰기는 효용 자체가 없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양만 채워내는 것은 ‘빡지’ 쓰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 ‘입력’할 때는 반복해서 쓰는 것이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보를 종합해서 ‘출력’해야 할 때는 무의미하다. 학생이 의지 없이 쓴 글을 첨삭할 때, 나는 컨베이어벨트 기계로 전락한 기분이다.


상금은 아이들을 자극했다. 이 동네 아이들에게 최고 5만원, 최저 2만원이 성취동기가 될까 싶었지만, 집에 돈이 많은 것과 자신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용돈이 생기는 것은 달랐다. 상금에 무관심한 학생 중에서는 학교로 상이 와서 방학식 때 방송실에서 상을 받는 명예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관심없었다. 우선 자신이 상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고, 일단 귀찮아들 한다. 이미 늦은 밤까지 숙제가 많은 아이들이다.


평소에 글쓰기를 강하게 압박하지 않지만, 이 대회만큼은 강하게 밀어붙이는 편이다. 사적으로는 내가 무수히 떨어져 봤기 때문에 학생의 수상으로 대리만족하기 위해서고, 공적으로는 강사로서 내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존재 가치가 실천으로 결정된다고 믿으므로 금전적 이익과 별개의 성과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진지해도, 학생들이 글쓰기를 영어/수학 숙제로 무질러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글쓰기 실력에 양극화가 시작된다. 수상과 무관하게 응모 조건을 지켜 완성도 높은 글을 써 본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 내 도움이 있더라도 자기 손으로 자기 글의 정점을 찍어본 학생은 혼자 쓸 때도 글의 저점이 높아져 있다. 수상한 학생은 ‘내가 되네?’를 겪고 나서 강한 성취 동기를 가지고 다음 글을 써 나간다.


이번 독후감 대회에서 초등학생 수상자 26명 중 수성구 학생 12명이다. 모두 ‘수성구’의 상징성을 내포하는 범어-만촌-황금에 속한 학교 학생들이다. 내 의지나 소개가 아니었다면 응모하지 않았을 내 학생 4명을 빼면 동천 5명, 동도 3명이다. 이 정도 규모면 학교 측에서 마음 먹고 응모한 듯했다. 달서구에서도 학교 측에서 단체로 응모한 듯했다. 내 학생을 제외하면 당선자 중 수성구 학생 비중은 약 30%다. 동천초보다 내가 당선자 수나 수상 질이 떨어져서 분했다. 사교육은 공교육에 져서 안 된다. 그러나 짜증날 일은 아니다. 내년을 기약하면 된다.


중학교로 올라가면 수성구 당선 비율이 뚝 떨어진다. 중학생 수상자 30명 중 수성구 학교 출신은 5명이었다. 범어-만촌-황금으로 제한하면 정화, 동도 2명이었다. 둘 중 하나는 내 학생이다. 이번에도 내 학생을 제외하면 당선자 중 주소지 기준 수성구 학생은 약 11%다. 코어 수성구는 동도 하나이므로 4%가 안 된다. 1등을 포함한 당선자 3명을 냈으니 그럭저럭 자존심을 지켰다. 그러나 당선자 6명 이상 못 되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내신 기간에 살짝 물리는 바람에 실력 있는 아이들이 응모하지 않았다.


수성구는 초등학생 때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다가 중학생 때부터는 식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부가 입시 체제로 빠르게 전환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내신, 수능에 보다 집중하기 때문이다. 시험 한 달 전부터 학원가에서 내신 분위기를 잡으면 ‘이곳은 본래 그런 곳’이므로 본래 그러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안타깝다. 대한민국 교육은 결국 입시로 귀결되기 마련인데, 대학이 원하지 않는 옛날 방식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신과 정시는 절대적이지 않다. 더군다나 중학교 시험은 대입과 무관하다. 시험기간 한 달 뺑뺑이는 무의미를 버틸 수 있는 내구력 키우는 데서 의미를 찾을 따름이다.


내신 5등급 시대, 입시의 성패는 글을 얼마만큼 쓸 줄 아느냐에서 갈릴 것이다. 고등학교 수행은 글밥이 많고, 서술형/논술형 시험은 닥쳐올 사실이다. 특히 수행에서 교과간 통합성을 발휘하고, 깊이를 파고 들 수 있는 능력은 정보를 가지고 놀아본 경험에서 키워진다. 중학교는 (독서와) 글쓰기를 연습할 수 있는 현실적 최후다. 고등학교는 내신, 수행, 수능으로 정신없다. 


이번 대회 공지가 일주일만 빨랐어도 내신 기간 살짝 비켜가면서 더 많은 학생을 옹모시킬 수 있었다. 공지가 작년 수준이었으면 거의 모든 학생을 응모시켰을 것이다. 응모 경험이 다음 글쓰기에 크고 작은 내적 동기가 되었을 텐데, 아쉬웠다. 내 학생들의 미래가 내가 목표한 것에서 조금 어긋났다.


작년에 독후감 대회 두 개에서 상금 150만 원을 획득한 학생이 있었다. 두 번째 대회는 내가 개입하지도 않았었다. 이 학생은 명백히 글을 쓸 줄 알았다. 표현을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입체적으로 갖고 놀줄 알았고,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도 짤 줄 알았다. 정서적 표현이 나보다 월등한 것은 덤이었다. 이 학생은 아이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비수성구 전교 10등권 학생으로 일반고에 갔다면 중경외시 라인이 현실적 목표였겠지만, 학생부로 승부 보는 학교에 진학했으니 중경외시 라인은 깔고 갈 것으로 예상한다. 달서구에서 여기까지 오던 학생이었다.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 길이 보인다. 그런데 새 길로 안 간다. 왜냐면 옆 사람도 안 가니까. 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갈 때쯤이면 대학 위상은 지금보다 더 떨어져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성패는 시험으로 따낸 대학 간판이 아니라 생성형 인공지능을 능숙하게 다루는 정도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 능력 함양은 손해볼 수 없는 투자다. 이기는 투자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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