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안 가 봐도 되겠나?”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요.”
2007년 2월 23일은 내 졸업식이었다. 나는 졸업식에 갈 생각이 없었다. 취업이 안 돼, 명분상 대학원 준비 중이었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학원도 사실은 세상을 회피하는 그럴 듯한 명분이었다. 나는 나의 백수를 기념하고 싶지 않았다.
“일생에 한 번 뿐인 졸업 아니냐?”
“등록금 갖다 바치면 다 나눠주는 졸업장이에요. 그리고 대학에서는 학부 졸업은 별로 신경 안 써요. 석사나 박사 쯤 돼야죠. 나중에 제가 대학원 졸업하면 그때 가요.”
“그래도 졸업장은 받아와야지.”
“학교에 며칠 놔둔다고 버리기야 하겠어요? 학교 갈 일 있으면 그때 학과 사무실 가서 찾아와도 돼요.”
엄마는 몇 차례에 걸쳐 졸업식 이야기를 꺼내셨고 그때마다 대화는 진전 없이 끝났다. 말을 물리친 엄마의 얼굴에는 늘 그늘이 남았다. 그때만 해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음지였다.
“그래도 졸업인데…….”
졸업식 전날 밤이라서 그런지 엄마는 전에 없던 속을 덧붙이셨다. 그늘진 서운함은 조심스러웠다. 엄마의 말줄임표 안에 숨어있는 내 졸업식들을 정렬해 보았다. 사진으로 남은 기억들은 선명했다. 유치원 때부터 엄마는 꼬박꼬박 내 팔을 감은 채 꽃다발처럼 웃으셨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는 ‘아이고, 우리 아들 이제 다 컸네.’라며 등을 쓸어주셨다.
엄마는 초졸의 노동자이셨다. 그 시절 일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전라도 분이 혼자 부산으로 오셨으니 일을 따라 온 것은 분명해보였다. 섬유 공장 혹은 신발 공장을 전전하셨을 엄마에게 대학생은 다른 세상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그런 대학생이 되고 졸업도 해냈는데, 이런 저런 상장, 반장, 1등을 수집하던 당신 아들은 당신의 옛날 미싱기보다 무능했다. 당신이 키워낸 것을 나는 키워내지 못해서 죄송했다.
나는 끝내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대학 졸업장은 엄마의 ‘상상된 기억’만큼 빛나지 못했다. 4년 등록금짜리 백수 공인 인증서. 꽃다발 속에서 백수를 자축하는 슬픈 희극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만나는 지인들이 취업을 물을 때면 난감했다. 내 무능을 질책하는 것인지 동정하는 것인지 모를 눈빛들을 매번 가시처럼 받았다. 나는 웃었고, 입 안에 쓴맛이 고였다.
입학 때만 해도 졸업하는 ‘그렇고 그런’ 선배들도 제 밥그릇 챙겨 갔다. 못해도 영업직은 꿰찼다. 겨우 6-7년 전 일이었다. 지금은 학사 졸업생이 설 자리가 없었다. 학사는 석사에 눌렸고, 석사는 박사에 눌렸고, 박사는 쓸데없이 많았다. 같이 졸업한 9명의 남자 동기들 중에 2명은 생소한 이름의 회사에 취업했고, 4명은 대학원에 갔으며 나를 포함한 4명은 백수로 추정되었다. 도서관 백수의 십중팔구는 공무원에 매달렸다. 대학을 나와 봐야 대학원과 공무원 준비의 양자택일뿐인 현실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을 오지 않고 그때부터 공무원 준비를 했더라면 하는 푸념도 심심찮게 떠돌았다.
“니 진짜 안 가 봐도 되겠나?”
졸업식 날 아침, 일 나가시던 엄마의 얼굴은 어젯밤에 머물러 있었다. 비싸서 힘들었던 학사모라도 씌어 드리면 잠시라도 그늘을 거둘 수 있을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다니까요. 중, 고등학교하고 달라서 대학은 졸업식 행사 같은 것도 없어요. 그냥 사진이나 찍고 각자가 학과 사무실에 가서 졸업장 찾아가는 게 다예요.”
“그래도 네 일생에 한 번 뿐인데…… 사진이라도 남겨야 되지 않겠나?”
“올 가을에 꼭 대학원에 붙을 거예요. 졸업사진은 대학원 졸업하면 그때 찍어도 돼요.”
“그래, 알았다.”
“다녀오세요.”
엄마는 주6일 영세 공장에서 일하시고 110만 원쯤 벌어 오셨다. 그때 억세게 일한 후유증으로 손을 세게 쥐지 못하셨다. 그리고 나는 혼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장성한 아들을 두고 문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해마다 살인적으로 뛰는 등록금을 혼자 짊어져온 엄마의 어깨가 좁았다. 등록금의 무게가 떠난 그 어깨는 아무 것도 없어 더 쓸쓸해보였다. 나는 배고픈 것이 죄스러워 반쯤 먹고 남은 밥을 밥통에 넣었다. 밥통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