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을 드나드는 일은 지겨웠다. 지겨워도 인맥을 넓히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마침 관우와 장비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기회다 싶어 먼저 아는 체하자, 안 그래도 불그스름한 얼굴이 한층 더 불콰해진 관우가 유비 밑으로 들어오기를 권했다. 뜻밖의 제안은 아니었다. 나는 자유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역사를 가지고 놀았다. 원소의 공손찬 공략을 1년 이상 지연시켰으며, 조조의 때 이른 형주 진출에도 헤살을 놓았다. 각국의 군주들은 내게 종종 사람을 보내 임관을 권했지만 나는 늘 거절해왔다. 내가 싸움개처럼 전투장을 찾아다니며 내 마음대로 전장을 누리는 것은 내 독립국 창건을 위해 전투 경험을 쌓고 함께할 동료를 두루 사귀기 위한 물밑 작업이었을 뿐이었다. 관우와 장비가 반가운 것도 그 때문이지, 유비의 눈에 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관우의 권유를 무질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장비는 대뜸 무예연습을 신청했다. 아차 싶었다. 나는 겨우 ‘삼단’ 정도의 필살기만 익혔을 뿐, 아직 장비의 적수가 아니었다. 허저나 손책 정도의 A급 장수들은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었지만 여포, 관우, 장비 같은 S급 장수들은 내가 모든 필살기를 갖추고 있어도 벅찬 상대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꽤 선전했다. 기를 채운 상태에서 ‘삼단’을 성공시켜 싸움을 우세하게 이끌어 갔다. 무신(武神)은 숨을 몰아쉬었고 나는 질까봐 짜증이 났을 뿐 내 호흡은 가지런했다. 갑자기 장비는 온 몸으로 빛을 뿜더니 ‘회복’을 썼다. 바닥에 닿은 체력이 두 마디 정도 차올랐다. 싸움 초반에 내가 몰아쳐 놓은 것이 있어서 아직까지는 내가 유리했지만 허탈했다. 팽팽하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기어이 장비의 ‘나선’이 발동되었다. 나의 ‘삼단’ 상위 호환 기술로, 나는 그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아프지 않았다. 귀찮을 뿐이었다. ‘불러오기’를 클릭했다. 3개월 전으로 돌아가 전투 두 번을 다시 치러야 했다. ‘현재 데이터를 보존하지 않고 다른 데이터를 불러오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가 팝업으로 떴다. 나는 머뭇거릴 것 없이 괜찮았다. 내 스펙에 단 1패의 오점도 기록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일기토, 전투, 설전이 완벽한 인간이어야 했고, 2월이면 대학 졸업이었다.
어디에서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 스펙이라고는 토익 친 적 없음, 운전면허증, 3선발급 방어율의 학점이 고작이었다. 학점이 3.0을 넘긴 것도 OO문화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을 매 학기 타먹기 위해서는 3.0을 넘겨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거기에 맞춰온 덕분이었다. 기껏해야 상상마당 우수작가로 선정된 30만 원짜리가 내 글쓰기 이력의 전부였다.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콩트의 성과였다. 재능도 없는 주제에 소설 이외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다. 소설을 읽었고 소설을 썼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었고 계속 그렇게 살 수 없었다. 대학원과 도서관 사이에 갇혀 있는 동기들 덕분에 내 신세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나도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들과 엇비슷한 신세라고 자위했다.
재능 없이 예술가를 꿈꾸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죄다. 예술은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 지점이 있어서 매일 열정의 크기만큼 절망해야 했다. 살리에리처럼 특정한 성과를 이룬 사람도 자괴감으로 비참했고, 소설가든 화가든 예술가의 직함을 달지 못한 병아리들은 생계의 일부를 포기해야 해서 무참했다. 절망은 다시 열정으로 타올라 선순환 할 수도 있지만 거듭된 절망은 무기력으로 악순환했다. 자살한 인간은 자신의 꿈과 열정에 대한 예의라도 지킨 셈이다. 나는 버릇없이 무기력한 채로 살아남았다.
한글 프로그램의 하얀 바탕은 독방에서 올려다본 천장 같았다. 겨우 한 뼘의 공간은 출소 일처럼 멀고 막연했다. 백지 위의 커서가 움직이지 않을수록 무기력이 깊어졌다. 무기력 속에서 모든 욕구는 의무로 치환되었다. 글쓰기는 생계를 일부 포기한 극단적인 선택이었기에 의무감은 컸다. 써야만 해서 다른 일은 할 수 없었고 써지지 않아서 가벼운 일로 도피했다. [삼국지X]를 클릭하는 것은 그런 식이었다. 분명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했는데 실천하지 않아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반성을 위장해 이런 변명만 늘어놓는, 나는 위선 가득한 쓰레기다. 나조차 내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죽지 못해 죄스러웠다.
게임은 재미없었다. 혈혈단신으로 시작해서 세 번의 천하통일을 이룬 내게 난세조차 예고된 미래였다. 나는 수시로 데이터를 저장하면서 현재에 작은 생채기가 나도 과거로 돌아가 다시 플레이했다. 내가 원하는 현재가 구현될 때까지 반복했다. 한 자리에서 안량과 문추를 연거푸 베어도, 병력 3만으로 8만 대군을 막아도, 좌자에게 ‘신선’을 배워도 무감각했다. 마땅히 되어야 할 것이 마땅해졌다. 3년째 플레이하는 [삼국지X]에는 신물이 났지만 졸음 속에서 시계를 보면 보통 새벽 3시를 갸웃했다.
자리에 누우면 한숨이 났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가 [삼국지X]인가. 삼국지 속에서 나는 점점 내가 원하지 않는 내가 되어 내가 나의 엑스트라가 된 것 같았다. 주인공들은 무대에 오르기 위해 그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내일부터는 진짜 써야지.’가 며칠 째 유예되고 있다. 어차피 써도 안 될 거라는 낙심에 태연해 인생은 낙태 중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에 초연했다. 궁지에 몰리면 빛바랜 앨범을 꺼내 사진을 눌러 그 시절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으므로 괜찮았다. 어떤 데이터를 불러올까. 열심히 노력하는 것에 허무를 느꼈던 중3 2학기 기말 고사 기간?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자퇴를 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말려서 수긍했던 고3?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21살? 아니면 처음으로 내가 직접 서점을 찾아가서 책을 샀던 초4?
1번 파일을 불러오자 다시 주점에서 관우와 장비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관우에게 먼저 말을 걸자 이번에는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한다. 1초 만에 혈연보다 깊은 정이 느껴진다며 의형제를 청한다. 이제 됐다. 유비와 장비는 옵션이었다. 조조의 서주 정벌에 유비는 곧 망할 것이므로 재야에 떠도는 의형제들을 내 수하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불법천재’의 열두 번째 궐기가 방구석에서 임박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