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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17. 2024

꿈꾸는 불효

신경 정신과에서 수면제를 타먹는 것도 현실이었고, 9월 개강까지 한 달 반 이상 일이 없는 것도 현실이었다. 타협점이 없는 두 개의 현실은 숨구멍을 죄는 실시간이었다. 밤마다 켜지는 불면에 대한 불안으로 불면은 점층 되었다. 약 없이 며칠 버텼을 때는 뒤통수를 찌르는 두통만이 나의 전부였다. 약을 끊으려면 고시원을 떠나 사방의 소음을 벗어나야 했지만 9월 개강은 그나마도 불투명한 기약이어서 돈이 달렸다. 중국 학생들의 비자 발급에는 변수가 많았고, 한국어 강사는 널렸다.


<한국어 강사기>라는 타이틀로 수필을 꾸준히 쓰려고 했지만 몇 편 쓰지도 못했다. 미니홈피에 올리는 일기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새하얀 불면 속에서는 생각이 다듬어지지 않았다. 거의 두 달간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쓰지 못함은 써야 하는 강박으로 다시 불면에 살을 더했다.


참다 참다 못해 엄마에게 불면을 털어 놓은 적 있었다. 엄마는 남들처럼 직장에나 들어가든지 전공 대학원에나 진학하든지 하지 왜 사서 고생이냐고 나무라시면서 보증금을 줄 테니 원룸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제발 그 빌어먹을 짓(내 소득 없는 글쓰기를 엄마는 그렇게 지칭하셨다.) 좀 하지 말라고도 쏘아붙이셨다. 나는 실제로 부동산 중개업자를 끼고 학교 주변 원룸을 물색했었다. 어렵지 않게 양 옆에 방이 없어 소음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곳도 찾아냈지만 정작 계약은 하지 못했다. 매월 추가될 방값, 밥값, 세금 등을 어림잡으면 20만 원쯤 되었고 나는 88만원 세대였다. 월 88만원의 수입만 보장됐어도 이사했다.


원룸을 포기한 후부터 엄마와의 전화 속에서 나는 숙면했다. 아침도 먹고, 고기와 과일도 챙기고, 친구들도 자주 만났다. 내 말의 유일한 사실은 시원한 것 정도였다.

“오늘도 덥제?”

“무슨 소리하요? 추워 죽겠구만. 아침에 일어나면 등이 시리요.”

나는 거드름피우듯이 말했다.

“그래, 니라도 시원하이 됐다.”

고시원의 에어컨은 무제한이었고 엄마의 슈퍼는 푸욱, 쪘다. 부도 임대 아파트 상가의 슈퍼라 장사가 될 리도 없겠지만 형광등을 켜야 했고, 아이스크림, 음료수 냉장고를 돌려야 했다. 출입문을 열어 놔도 열이 빠지는 속도보다 고이는 속도가 가팔랐다. 에어컨을 틀 바에 가게 문을 닫는 게 올바른 산수였다. 6년째 혈압 약을 드시면서도 엄마는 여름을 찜통에서 보내셨다.

“고생이 많으요.”

기껏 그 정도. 내 말은 내 신세의 변명 같아서 말꼬리가 말려 있었다. 엄마가 듣지 못하길 바랐다.


애초에 글을 모른 채 전공에 성실했다면 지금쯤 못해도 교수님 연줄을 타고 OO에는 들어갔을 것이었다. 두 학번 선배 하나가 OO에 원서를 썼다가 그쪽 책임자가 담당 교수 이름을 확인하고 우리 교수님께 먼저 연락이 왔다는 것은 후배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일화였다. 내 직장 근처로 이사를 하면 엄마와 함께 생활할 돈 정도는 다달이 통장에 꽂힐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글 쓰겠다고 한국어 강사를 생업으로 삼았다. 최소한 개인 시간은 많이 확보되니까. 실제로 졸업 후에 OO 인턴 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거절했었다. 그래 놓고도 얻은 게 구질구질한 문장뿐이었다. ‘하면 된다.’, ‘꿈은 이루어진다.’를 얼마나 더 밀어붙여야 하며, 그동안 무너지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어떻게 양심에서 격리시켜야할까. 내가 글만 비켜났다면 지금쯤 우리 엄마도 밤마다 동네 아줌마들과 왁자지껄 수다를 굴리면서 운동장을 산보하셨을 텐데.


오히려 엄마는 내가 집에 내려갈 때마다 십만 원씩 쥐어주셨다. 차비와 내가 하루 반나절 가게를 지키는 일당이 명분이었지만 대구-부산 왕복 차비는 이만 원쯤 되었고 나는 가게에서 법정 최저임금에 육박하는 군것질을 해치웠다. 뿐만 아니라 2박 3일 동안 회, 과일, 치킨, 삼겹살, 낙지볶음 등 엄마는 내 입이 쉬는 것을 참지 않으시고 어미 새처럼 음식을 물리셨다. 얼핏 봐도 내가 내려갈 때마다 20만 원은 깨지는 것 같았는데 엄마는 눈만 마주치면 객지에서 뭘 먹겠느냐며 거의 울상을 지으셨다. 그러다가 지난번에는 오만 원만 주셨다. 담배 값 때문에 돈이 말랐다고 쩔쩔매시며 웃으셨다. 내가 마지못해 받으면 엄마는 그때서야 웃음에서 어색함을 걷어내셨다. 세상에 난 지 28년이 지났는데도 엄마의 부착지가 필요한 아기가 되지 않고서는 아직 아들 노릇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엄마는 꿈을 꿔도 나는 꼭 서너 살 아이로 등장한다고 하셨다.


“엄마, 내 이번에 내려가면 삼계탕 좀 해주소.”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최대한이었다. 엄마가 들 자리를 만드는 데는 돈이 들지 않았다.

“오이야.”

“그라고, 콩국수도 좀 해주소. 여는 사 물 데가 없더라.”

“아따, 상전 내려오시네.”

“계란 장조림도 좀 해주고.”

“아이고, 빌어 묵을 짓 하는 백수가 그런 거 먹을 줄은 아나?”

“와? 백수는 입도 없나? 엄마 찾아가는데 아들 서러버서 살겠나?”

“언제 올끼고?”

“이번 금요일에.”

“언제 가는데?”

“다음 주 월요일.”

“오래 있다 가네? 밥은 문나?”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엄마의 밥 타령은 시간을 초월하셨다. 도서관에서 고시원으로 돌아오며 전화를 한 시간은 밤 11시 즘이었다. 오늘은 약을 먹을 지를 망설이며.


될 수 있으면 약을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어서 약을 먹지 않다가 머리가 짜개지고 나서야 이틀 정도 약을 먹었다. 내가 집에 가는 이유 중에서 약 없이 잠을 충전할 수 있는 타산의 비중이 컸다. 그 크기에 엄마가 가려지는 것 같아 집으로 가는 길은 늘 떳떳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노포동 터미널 앞 행상이 파는 옥수수빵 하나로 에워졌다.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걸로 한 끼를 때우셨다. 뽀빠이의 시금치처럼, 젠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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