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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17. 2024

레알 루저는 괜찮아요

늘 그렇듯 방구석이었다. 할 일은 없는데 할 일은 많았고, 할 일은 많은데 할 일은 없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며 작업 중이었다. 컴퓨터로 작업하면 다들 그렇듯이 한 눈을 팔다가 훅, [미녀들의 수다]에서 흘러나온 루저(loser)에 낚였다. 패러디 게시물까지 뒤졌다. 난생 처음으로 디시인사이드에도 접속해봤다. ‘루저의 난’이라고 했다. 화자의 철없음인지, 누리꾼들의 맥락을 거세시키는 악습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177cm짜리는 그 이후에나 루저에 대한 입장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즉시 <미녀들의 수다>를 찾아서 봤다. 계획한 공부량이 만만치 않았지만 어차피 식전이라 ‘밥 먹으면서’의 핑계는 댈 수 있었다. 김치 포함 세 가지 반찬을 노트북 앞에 깔고 아침을 먹었다. 오전 7시 50분이었다. 모니터에서는 8시가 되기도 전에 된장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마녀 사냥으로 일컬어지는 비난들을 말릴 생각이 없어졌다. 만약 방송에서 한 남자가 “D컵도 안 되는 여자들 모두 Loser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면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똑같은 수위로 그를 비난했을 것이다, 골 빈 놈이라고.


더 놀라운 것은 그녀는 그날 방송 맥락의 일부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몇몇을 제외하면 출연 여대생의 생각은 오십보백보였다. 키뿐만 아니라 돈 없는 남자에 대한 여과 없는 멸시와 사랑보다 돈이 우선되는 결혼관이 당당했다. 자본주의는 서양에서 들어왔는데 서양에서 온 ‘미녀’들이 오히려 한국 여대생들에게 돈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에바와 도미니크는 청국장 냄새급 문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특히 ‘원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라면을 끓여 먹느니’는 내게 구체적인 칼끝이었다. 이곳은 원룸이 초과 공급된 탓에 기형적으로 방값이 저렴했다. 월세 21만원은 어지간한 대학가의 고시원 방값보다 쌌다. 그러니까 나는 정상적이었다면 기껏 고시원에 있을 신세라는 말이다. 불면이 아니었더라도 이 구석까지 와서 방을 계약해야 함은 통장의 자연법이었다. 거기다가 라면과 다름없는 대유법의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녀들의 논리에서 나는 연애 자격이 없었다.


물론, 동의했다. 무직자의 미래에 다른 사람의 애정을 실을 수는 없었다. 자해적인 양심이어도 어쩔 수 없다. 누군가가 포근해질 때마다 나는 그녀들의 결점에만 집중해서 핑크빛 싹을 잘라내 왔다.


여자 후배 하나가 내게 소개팅을 권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임용 준비나 잘 하라며 타박을 놓았다. 녀석은 정말 괜찮은 언니라며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사양했고 녀석은 툴툴거렸다. 미안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녀석이었다. 녀석이 자신에게 작업을 걸어오는 남자 이야기를 털어 놓을 때도 나는 객관에 서려고 필사적이었다. 어떤 남자는 녀석에게 곰 인형을 선물했고, 어떤 남자는 드라이브를 시켜줬고, 어떤 남자는 녀석을 데리고 유원지로 가 밥을 사줬다. 모두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녀석의 안부전화 끝은 모두 뒤숭숭했다. 나는 녀석의 작은 키와 알감자 같은 생김새와 빈약한 교양수준으로만 녀석을 해석했다. 덕분에 지금은 녀석이 보고 싶거나 하지는 않다. 이것이 나의 진짜 ‘루저’였고, 많은 남자들도 그 방송에서 다양한 색깔의 ‘루저’에 마음을 베였을 것이었다.


한 번은 스터디 중에 루저의 칼을 제대로 맞은 적이 있었다. 야, 남편 월급 200만 원 가지고 너 살 수 있을 거 같아? 여자 네 명에 나 혼자 남자였다. 돈이 있어서 다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 있으면 최소한 불행하지 않을 수는 있다고, 30대 미혼 여성 둘이 20대 미혼 여성 하나를 설교했다. 내가 이래서 결혼할 생각을 못 하겠다니까. 듣고 있던 다른 20대 여성이 거들었다. 그녀들의 말에 동의했지만, 나는 가진 숫자가 없어서 조용히 무참했다.


나는 숫자 대신 글자로 나이를 먹으며 연애 불능을 감수했다. 다음 달이면 4년의 혼자가 가득 찬다. 고독도 발정도 모니터 앞에서만 해소되었다. 그렇게 얻은 잡기로 블로그나 꾸려 나갔다. 각종 문학 신인상에 보내는 우편료로만으로도 글자는 적자여서 인생의 적자도 누적되었다. 수험생활이 길어지며 잘 쓰지도 않았다. 숫자의 무능에 글자의 무능까지 포개져, 내 공부는 무능의 진행형이었다. 나는 아직도 엄마의 등골을 발라 먹고 있다.

나의 보잘 것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그녀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한 남자 한국어 강사는 월급 200만 원이면 감사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가 이룰 수 있는 숫자의 최선마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짓밟는 중이었다, 날 앞에 앉혀 두고.


“오빠 그래도 오늘은 잘 입었잖아요.”

“야, 이십대 눈에 괜찮은 삼십대 남자는 괜찮은 거 아니다.”

20대가 내 옷차림을 언급했을 때, 30대는 단박에 무질렀다. 평소에 체육복만 입고 다니다가 그날은 다른 일정이 있어 내 딴에는 구두에 맞춰 입고 간 차림이었다.


현실에서는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숫자를 닮아가야 한다. 결혼을 앞두면 자동차 배기량, 연봉 액수, 집 평수가 그의 인격이 된다. 숫자와 숫자는 부등호로 관계되고, 사칙연산으로 산술된다. 숫자가 없는 인간은, 특히나 남자는 레알(royal) 루저다.


며칠 전에는 내게 옷을 잘 입었다고 했던 여학생과 새벽 1시부터 160여분 동안 통화한 적이 있었다. 잡담이 전부였다. 통화 목록을 차지한 절대 다수가 그녀였다. 그녀는 몰라도, 내가 그녀를 가슴에 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사시사철 붉은 광대와 게으른 습성에 주목하는 중이다.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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