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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17. 2024

백수의 자본론

“여보세요?”

“응.”

“아, 침묵이 길어져서.”

“아…….”

5초도 안 되는 침묵 동안 나는 바빴다. 보자고 할까, 말까. 


브루디외(Bourdieu)는 말했다. 자본이 취향을 결정한다고. 우리가 우리 취향에 따라 능동적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취향이란 실상 개개인 각자가 처한 사회 환경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취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관습 체계가 된다.


너희들은 쉽게 말한다. 안에만 있지 말고 사람들도 좀 만나라고.

“공부하는 거 바쁘다. 정신없어.”

아니다. 돈이 없어서다. ‘사람=지출’은 나의 성경이다. 밥을 먹자는 말을 꺼내면 내가 사야할 것 같아서 먼저 밥을 먹자고 못한다. 추렴해도 가랑이 찢어질 판이다. 스파게티에 커피 한 잔이면, 학생 식당 서너 끼 식비는 나온다. 서른한 살짜리 백수가 말한다. 자본이 성격을 결정한다고. 나는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흔히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리는 자장과 짬뽕, 물냉면과 비빔냉면, 프라이드치킨과 양념 치킨 사이의 치열함도 내겐 없다. 500원, 혹은 1,000원 차이로 전자들의 승리다. ‘아무 거나 상관없어.’라고 착각하는 정도가 심리학의 선처다. 물론 그런 선택의 기로조차 이데아의 세계다. 현실은 ‘일요일의 요리사’가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빈’ 닭 꼬지로 강제된다. 체면보다 라면이 소중하다.


내 죄는 월 88만 원이라도 버는 것이 소망인 것이다. 방값 20만 원을 빼고 68만 원이면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다. 나이 먹고 엄마에게 돈 타 쓰던 염치없는 시절은 1년 전에 끝났다. 엄마가 살던 임대 아파트가 최종 부도처리 되면서 보증금 떼인 채 쫓겨나게 생겼다. 집안의 생계도 그 아파트 상가의 구멍 가게여서, 이제는 내가 돈을 보태드려야 될 판이다. 남은 돈으로 두 달쯤은 연명할 수 있을 듯했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결심하는 데도 며칠이 걸렸다. ‘학원 강사’를 떠올리면 <연애의 목적>의 박해일이 생각났다. 쫓겨난 사람, 끝난 사람. 김애란의 소설에서 본 ‘먹물 막장’이라는 문구 또한 내 결심을 막아섰다. 한 번 그 일을 시작하면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인생이 이끼처럼 종결될 것 같았다. 이 나이에 아르바이트라니……, 그러나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막상 결심이 섰을 때는 이력서 넣을 데가 없었다. 전공 살리려면 국어로 가야하는데 국어 쪽은 일자리가 드물었다. 사실 수능에서는 언어 영역보다 수탐1 성적이 더 좋아서 수학 쪽이 자신 있었지만, 자기 소개서에 수학 강사로 쓸 스토리가 없었다. 몇 군데 이력서를 내 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학원 일했던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이유를 유추할 수는 있었다. 일단 나는 학원 경력이 없었다. 게다가 대학 어학원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쳤던 경력은 작은 학원 입장에서 부담스런 모양이었다. 원장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다들 그때 받던 시급과 그들이 줄 수 있는 시급 사이에서 말꼬리를 흐렸었다. 게다가 전공 무관 초임자를 뽑는 데서는 여자 강사를 원했다. 마찬가지 이유였다. 남자 강사는 시키기 부담스럽다. 이십대 여자 강사 지원자들 중에 임용 시험 공부한 사람도 널렸다.


체력에도 자신이 없어서 주말에 잠깐씩 할 수 있는 택배 물건 상하차나 건설 인부 일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본가가 흥청망청 쓰는 돈의 일부가 내게 있으면 그게 세계의 지식 일부로 환원될 수 있을 텐데, 라스꼴리니꼬프의 변명이 순간순간 빙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배짱도 없고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문 단속이 허술한 집도 몰랐다. 사기를 치고 싶어도 소재도 말주변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생산적인 범죄조차 한 달 방값이 나올까 말까한 편의점 털이가 전부였다.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잉여 인간, 똥 만드는 기계. 다행히, 목 대신 허리를 졸라맸다.


나예와 보기로 한 약속은 사 주째 유예되고 있었다. 첫 주는 설이라서 내가 본가에서 계획보다 오래 머무는 바람에 취소되었고, 둘째 주는 나예가 일이 있었다. 셋째 주는 같이 만나기로 한 영웅이와 산에 갔다가 왔다. 나예한테서 연락 왔나? 아니. 그럼 먼저 연락하지는 말자.


우리는 대학 동기였다. 영웅이는 수험생이어서 나와 같은 백수였다. 등산이야 차비만 있으면 할 수 있었고 점심은 산중턱의 절에서도 해결 가능했다. 나예는 기간제 교사로 꾸준히 일하고 있었다. 일 년에 두세 번씩은 정기적으로 만났는데, 번번이 나예가 주로 돈을 썼다. 매번 얻어먹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사주는 것은 더 부담스러웠다.


약속 유예 사 주째, 나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태윤이 결혼식 때문에 물을 게 있어서였다. 아니, 대체로 문자로 의사소통했었으니 꼭 그 이유 때문이 아님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예 본인도 우리 약속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우리 약속을 상기시켰다. 나예가 소외로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끊을 게.”

“응, 개학 잘 하고.”

“응, 안녕.”


(한국‧일본에서) 

다음번의 언제라고 정확하게 약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을 남김으로써 상대에게 작은 기대를 하게 만들며, 관심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건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말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하고 있고, 이를 받는 상대 또한 의례적으로 건네는 인사말로 받아들인다. - 김보인(2007:40), 한․일 의례성 인사말의 사회언어학적 연구, 日本文化學報 32, 한국일본문화학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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