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힘’과 ‘짐’ 사이 어디쯤에 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일 수도. 이순재네 집이 그랬다. 범이 엄마나 시청자처럼 제3자로서 이 집은 재미있고 활기차서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집에서 행복했을까?
1. 이순재(할아버지)
가부장은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다. 식구들을 부양하는 경제력을 유지할 때 권위는 식구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한다. 무능한 수컷들은 관습에 기대어 식구들에게 권위를 강요하기도 한다. 강요된 권위는 권력의 폭력으로 드러난다. 이순재는 정서적 가정폭력범이다.
이순재는 무능한 한의사로 가부장 자격이 없다. 명의만 원장일 뿐, 병원은 며느리 박해미가 주축이 되어 운영된다. 자신의 무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적으로도 결함이 많다. 강자에게 힘 못 쓰고, 약자에게 가혹하다. 대근이와 개성댁 앞에서 꼬리를 말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주인 품의 치와와처럼 함부로 군다. 자신이 곧 집안의 법이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식구는 반드시 응징한다. 그런 주제에 카메라 앞에서 말도 못할 만큼 소심하고, 야동을 보다가 친인척들에게 들키거나 순애를 흠모하다가 자식들에게 발각될 정도로 도덕적 결함도 크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 집단에서 우두머리 수컷의 스트레스 수치가 가장 높다고 한다. 그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순재는 권위의 알맹이가 없어서, 오직 나이 많은 남성이 가장이 되는 관습에 기대어 가장의 체면을 유지해야 하기에 폭력은 더 가혹해진다. 설득력 없는 권위를 강제한 결과 식구들과의 유대가 약해진다.
2. 나문희(할머니)
병원장 아내의 기품이나 권위는 없다. 정이 넘치지만, 아직도 식모의 연장선에 서 있다. 남편과 며느리로부터 받는 무시가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문희의 모든 제안은 무시된다. 남편은 여행을 갈 때도 일정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 나이의 사랑은 애틋할 수 없어도 전우애 같은 우정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남편은 가부장의 권위만 세울 뿐 나문희와의 교감에 관심 없다. 나문희는 봄이면 마음에 바람이 드는 감성적인 사람이므로 남편의 무심함에 받는 상처가 더 크다.
순재 도련님으로 살아온 남편이야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그땐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핑계 거리라도 있었다. 그러나 며느리의 무시는 참기 힘들다. 그때도, 지금도,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며느리는 나문희의 말을 자르고,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는 듯한 화법을 쓴다. 며느리의 말은 대체로 맞지만, 맞는 말에 타인에 대한 존중은 없다. ‘오~케이’를 비롯한 태도가 배우지 못한 나문희의 열등감을 바늘처럼 찌른다. 나문희가 며느리에게 가진 감정은 혐오에 가깝다. 개성댁이나 영기네, 급기야 둘째 며느리인 신지에게 ‘싹퉁바가지!’를 욕하지 않으면 화병으로 앓아누울 지도 모른다.
3. 이준하(큰아들)
이 집에서 유일하게 행복할지도 모를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사람이 순하고, 나쁘게 말하면 생각이 없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해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 타고난 효자이자, 아내에게 충실한 팔불출이자, 친구 같은 아버지다. 술버릇도 사람에게 치대고 안기는 것이다(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집안이 쑥대밭이 되지만).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줄 안다. 아버지와 아내의 강한 기질과 동생 민용의 까칠함을 묵묵하게 받아냄으로써 집안의 최소한의 안정을 수호한다.
그러나 내심 주눅들어 있는 인물이다. 부전자전 격으로 이순재만큼 무능하다. 주식 투자한다면서 집에 처박혀 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늘 타박 받는다. 몇 번의 입사 기회도 놓친다. 나중에는 자기 회사를 차려 크게 성공하지만, 만약 우연한 성공이 없었다면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식구들에게 준하의 자살은 잠재된 불안이었다.
사람이 좋다고 해서 자존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생 민용의 ‘존경’ 한 마디에 뛸 듯이 기뻐한 것은 응축된 열등감을 반증한다. 한동안은 아무 데서나 방귀 뿡뿡 뀌는 식충이 노릇을 버틸 만하지만, 실패의 시간이 오래갈수록 식구들의 불안이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4. 박해미(큰며느리)
내가 박해미라면 이 집안의 부당함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해미는 실질적 가장이다. 조그마한 한약방을 빌딩으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었다. 시아버지가 받는 환자는 하루 한둘이므로 집안 수입은 절대적으로 박해미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의 많은 부분을 책임져야 했다. 극중에서는 여기에 대한 불만이 나오지 않지만, 현실의 박해미라면 충분히 스트레스 받을 부분이다. 집안일은 차라리 남편이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지만 남편은 백수 주제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버릇없는 시동생이 있다. 잘잘못을 떠나 두 사람은 맞지 않았다. 박해미는 뛰어난 능력으로 집단을 자기 통제 안에 두는 것에 익숙하다. 시아버지마저 사실상 자기 통제 아래였다. 이런 박해미와 극단적 개인주의자 시동생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박해미의 조언조차 시동생에게는 부당한 간섭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본 시동생의 무례한 대응은 박해미로서는 어처구니없을 것이다. 적대적인 상대와 한 집에 사는 것은 곤혹이다.
5. 이민용 (작은아들)
어머니를 제외하면 친한 식구가 없다. 그 어머니도 형과의 유대가 더 강하다. 아버지와는 데면데면해서 서로 할 말이 별로 없는 사이다. 아버지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휴일이면 등에 1~5가 적힌 이 씨네 추리닝을 입고 약수터 가기를 강제하는 등 시답잖은 팀플레이를 종종 요구했다. 개인주의 성향이 극도로 강한 민용에게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고, 민용은 납득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짜증내는 인물이다. 타인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지만 공격당하면 상대가 누구든 되돌려준다. 진화에 가장 유리한 전략이긴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마 그러지 못해 견딜 뿐이다.
형은 사람 자체가 좋아 그럭저럭 모나지 않게 지냈지만 형수와는 적대적 관계다. 어머니가 ‘싹퉁바가지’라고 부르는 것만큼 형수를 혐오한다. 아버지를 대하듯 참지 않고, 형수의 간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적대 관계가 악화된다.
조카들에게는 학교 선생님이기도 했다. 이민호와는 특별한 교류가 없었고, 이윤호와는 코드가 맞는 듯하지만, 이윤호는 삼촌을 연적으로 바라봤기에 사실상 이 씨 집안에서는 옥탑방처럼 정서적으로도 고립된 인물이다. 아니, 고립되고 싶은데, 자신의 방이 식구들의 아지트가 되는 것처럼 고립되지 못해 짜증이 넘친다.
6. 이민호(큰손자)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반장으로 꿀릴 것 없지만 집에서는 한 살 어린 동생에게 맞고 산다. 할아버지의 절대 비호가 있더라도 동생과 같은 방을 쓰는 한 집은 안전한 곳이 아니다. 민호에게 집은 하극상의 폭력이 도사린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이와의 비정상적인 연대를 형성했는지도 모른다.
7. 이윤호(작은손자)
피해망상자다. 편애를 입에 달고 산다. 사랑 받을 짓을 하지 않고 결과의 공정만 바라는 것은 무지하고 뻔뻔하다. 오토바이와 폭력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한 식구들의 애정은 형에게 더 분배될 수밖에 없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편애라고 여길 것이므로 가정 내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답쌓여 갈 것이다.
게다가 삼촌과는 연적 관계다. 자신의 첫사랑인 담임 선생님과 삼촌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데, 삼촌과 한 집에서 대면해야 했다. 담임 선생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외부에 드러내면 안 되었기에 삼촌과 함께 사는 불편함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
인간은 동일한 강도의 고통과 쾌락을 받을 때,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는데, 가족은 ‘가족’이어서 적정 거리를 무시하기 일쑤다. 그래서 화목하기 어렵다. 만약 화목을 느낀다면, 나문희나 이준하 같은 식구들의 희생 덕분일 수도 있다.
이 씨네가 나쁘지 않은 가족을 유지하는 것은 시트콤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접근해보면 돈 덕분이다. 자기 건물을 가진 병원장의 경제적 여유는 식구들의 구성원 간 스트레스를 다른 것으로 풀 수 있게 도와준다. 돈이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소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참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가난하다면 이순재의 꼰대질을 받아주고, 이민용의 까칠함을 묵인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결국 돈으로 가족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집안 식구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지 않다. 싫어하거나 불편한 사람과 한우를 먹느니, 혼자 라면을 먹는 게 맛있다.
초등학생 때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변한 이유는 경제적 요인 때문으로 배웠다. 농업에서 공업을 넘어 서비스업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식구들은 밥벌이를 따라 흩어져야만 했다. 그렇다면, 경제적 요인이 충족되면 다시 대가족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문화적 요인 때문에 대가족은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서로 너무 달라졌다. 이순재네도 각자 따로 살았다면 각자 더 행복했을 것이고 가끔 만나는 것으로 친족의 우애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식구.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너무 가까우면 짐이다. 힘이 되기 위해서는 적정 거리가 필요한데, ‘가족’, ‘식구’에 뿌리박힌 혈연 공동체의 응집력이 ‘힘’을 ‘짐’으로 바꾸고 있다. 결혼으로 새로운 가족을 꾸릴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가족까지 울타리 안으로 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힘과 짐의 수학를 제대로 풀어가고 있을까? 은근히 쉽지 않아 수포자가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