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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Feb 08. 2021

전국노래자랑 - 최후의 고향

(feat.고향의 봄, 아스가르드)

실시간 검색어에 ‘송해’가 치고 올라올 때, 나는 「삼포 가는 길」을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초등학교의 소소함과 박사 과정으로 모교 지박령이 되었던 친구마저 떠난 캠퍼스의 허허로움도 헤아린다. 초봄이나 늦가을, 손 안에 고인 자판기 커피의 허약하지만 옹골진 온기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아쉬움이 떠오른다. ‘땡!’ 끝에 매달린 여음의 시간을 예감한다.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 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송해는 곧 전국노래자랑이었다. 전국노래자랑은 내 기억이 생성될 때부터 이미 존재했던, TV의 고향이었다. 고향은 내가 선택한 적 없이 내 유년의 바탕이 되었듯, 전국노래자랑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가 섭취한 정서의 밑바탕이었다.


일요일 오후는 의외로 한가할 때가 많았다. 특히 한여름이나 한겨울, 밖에 나가기 싫어 집에 처박혀 있지만 별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럴 때는 TV를 보는 수밖에 없는데, 채널 선택권은 어른들이 갖고 계셨다. 어른들은 일주일마다 복용하는 심장병 약처럼 전국노래자랑을 챙겼다. 심지어 내 모든 걸 오냐오냐 해주시던 할머니까지도 전국노래자랑을 양보하실 때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 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음악 프로그램에 일관되게 무관심했다. 내 예능 고향 [무한도전]조차도 콘서트나 가요제 본 공연 편은 거의 다시 보지 않았다. [복면가왕]에서 하현우가 ‘하여가’와 ‘일상으로의 초대’를 부르는 것을 클립 영상으로 챙겨본 것이 내가 본 최신 음악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어른이 될 꼬마는 이미 쿵짝쿵짝 반주와 자신의 관심 목록에 없는 노래를 불러대는 전국노래자랑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국노래자랑이 끝나면 만화가 방영되므로 나와 동생은 전국노래자랑의 시간을 견뎠다.


우리가 전국노래자랑을 견디는 방식 중 하나는 출연자 나이를 맞추는 것이었다. 출연자의 이름과 나이가 자막으로 공개되기 전 서로 예상 나이를 베팅했다. 내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두 살 터울의 형제에게는 이기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정확하게 맞추면 1점을 추가했다. 나중에는 부모님이 가세해 4파전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늦어도 고등학생이면 전국노래자랑과 마주할 일은 없어졌다. 바쁘기도 했고, 한가해지더라도 TV를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낼 대안이 생겨났다. 특히 집에 PC가 들면서는 ‘고인돌’이나 ‘삼국지’를 하는 게 더 유익했다. 전국노래자랑은 내겐 완전히 잊힌 프로그램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강산도 변했을 즘, 경주에 여행 갔다가 허름한 돼지국밥집에서 전국노래자랑과 재회했다. 자전거로 경주 곳곳을 누빈 사흘째 날이어서 친구와 나는 지쳐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국밥만 먹고 있는데 익숙한 실로폰 소리와 ‘전구~욱’ 다음에 ‘노래자랑’과 ‘빰빰빰 빰빰 빰빠~’가 이어졌다. 우리는 무조건반사 되듯 TV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저게 아직도 하네.”
 하며, 일부러 자리를 뭉개며 20분쯤 보다 나왔다. 타지에서 동네 아저씨를 만난 기분이었다. 송해 아저씨는 잘 지낸 모양이었다. 변한 게 없었다. 그의 변치 않음이 왜 반가운지는 2-3년 후에 알게 되었다.


친구가 모교에서 박사 과정으로 있을 때는 모교에서 종종 만났다. 졸업 후 학교 앞 상가가 변해 감을 3-4개월 단위로 확인했다. 단골 오락실과 식당이 사라졌고, 내가 머물던 고시원은 파스타 집으로 바뀌었다. 점점 낯설 게 변해가더니 급기야 ‘복할매집’까지 문을 닫았다. 복할매집은 할머니 서넛이서 운영하는 떡볶이집이었다. 떡볶이는 그저 그랬지만 튀김과 함께 사면 늘 넉넉하게 주셨다. 대량의 안주가 필요한 대학생들이 붐볐다. 헤어질 때는 꼭 ‘복 많이 받으이소.’라고 인사해주셨다. 할머니들의 습관적 인사말일 수도 있지만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보다 친근하고 정겨웠다. 그날 처음 「삼포 가는 길」을 떠올렸었지만 상가의 생태계를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은 현상이었다.


복할매집. 2007년 영남일보 기사에 사진이 남아 있네요. 사실 제가 겪은 할머니들과 같은 분인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복할매집 폐점보다 더 쓸쓸한 것은 친구가 졸업 후 타 도시로 포닥(Post Doctor)을 가버린 것이었다. 어느 날 졸업 증명서 때문에 모교를 방문했을 때, 모교는 갑자기 낯설어져 있었다. 내가 가장 빛나던 시절의 공간이 문득, 육첩방은 남의 나라, 그런 기분이었다. 그때 알았다. 「고향의 봄」은 틀렸다.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의 산골은 고향의 핵심이 아니다. 그것과 엇비슷한 지형은 전국에서 몇 곳쯤 찾아낼 수 있다.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아스가르드는 장소가 아니라 백성들이라는 토르 아버지의 말은 옳았다. 지금 내 모교는 안동과 전주에 있다. 처자식이 딸린 모교의 조각들은 한 곳에 모이기 힘들었다.


전국노래자랑,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송해가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은 [전원일기]도 가고, [가족오락관]도 가고 남은 거의 유일하게 살아 있는 과거다. 송해의 전국노래자랑이 있기에 나는 과거에서 떠밀려난 것이 아니라 과거와 연결된 일체감을 연명할 수 있다. 송해는 고향의 최후 보루인 셈이다. 내 고향의 봄은 ‘(딩동댕동) 나의 살던 고향은 전구~욱!’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언젠가 맞닥트리게 될 송해의 죽음은 연예인 한 명의 죽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남은 삼포와 아스가르드의 멸망이다.


나는 여전히 전국노래자랑에 관심 없다. 그러나 꼭 오래오래 방영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식당에서 또 무심코 마주치면 무얼 먹고 있든 뱃심이 더 든든해질 것 같다. 종국에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 시간은 최대한 지연되길. 송해 형님 만수무강이 딩동댕동,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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