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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22. 2024

배달비의 그늘

사람들은 주문한 음식을 내 방에서 먹어야 하는 이기심을 모른다. 음식 배달은 인간과 지구를 향한 난폭한 습관이다. 맛있는 게 먹고 싶다면 밖으로 나가고, 집에서 먹어야 한다면 적당히 먹어도 괜찮은 무던함의 윤리는 무시받기 십상이다. 겨우 배달 음식이기에. 그러나 잦기에, 배달 음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화 된 탐욕의 집체다. 돈이면 다 정당화 된다. 그러나 돈이 세계를 정직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2005년 중국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 할 때, 짜장면은 3,000원이었다. 일당은 평일 30,000원, 주말 35,000원이었다. 최저임금 2,840원이던 시절, 하루 11시간 일하면 평일에는 최저임금도 못 받은 셈이다. 배달한 그릇도 찾으러 가야 하기에 배달 한 그릇만 할 때의 내 인건비에, 인간의 존엄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손님들은 3,000원에 투입된 노동력의 출처를 상상하지 못했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므로 배달 노동은 있지만 없는 노동이었다. 배달 노동은 배달된 음식의 조리 과정일 뿐,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뿐, 노동의 가치가 비용으로 산술되지 않는 직업은 분명 천했다. 모텔, 단란주점, 공사장에서 받은 하대의 눈빛과 말투를 기억한다. 사용자의 편리는 누군가의 착취로 이뤄지는 제로섬 게임의 주(主)작용임을 각성했다. 편리가 저렴할수록 착취는 집요할 것이다.


배달앱은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 끼어들어 비용을 발생시킨 고약한 플랫폼이지만,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 실질 노동을 투여했던 배달 노동자의 가치를 재고한 순기능도 있다. ‘배달비’ 개념이 생겼을 때, 기분이 묘했다. 이젠 소비자 입장에서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배달비가 거슬렸지만, 짜장면 한 그릇을 배달 가던 내가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좋든 싫든, 드디어 우리 사회는 없는 채로 존재했던 배달 노동에 제대로 된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배달비가 지나치게 비싸다는 여론을 마주할 때면, 얼마면 적절한지를 되묻고 싶어졌다. 택배비와 비교하곤 하는데, 음식 배달은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므로 단순 비교는 무리다. 웹툰이나 OTT에서 이미 일반화 되었듯이 콘텐츠(음식) 소비는 즉시성에 더 비싼 값이 매겨진다. 더군다나 오토바이 운전에는 위험수당이 붙어야만 한다.


배달하며 사고도 겪었다. 옆에서 튀어나온 차량 때문에 브레이크를 잡다가 빗길에 미끄러졌다. 그나마 아파트 단지 내여서 도로가보다 낮은 속도에서 발생했고, 지나다니는 차가 없어서 2차 사고도 없었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며 미끄러지는 동안 주마등을 체험했으나 헬멧 덕분에 팔, 배, 무릎의 찰과상 정도로 그쳤다. 내가 큰 길을 달리고 있었으므로 내 잘못은 없거나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흘린 피는 내 몫이었다.


작금의 배달비에 위험수당이 반영되어 있느냐 하면, 글쎄다. 비싸다, 비싸다 해도, 대부분의 속도 서비스는 착취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당일배송은 물론, 일반 택배도 지나치게 빠르다. 그 속도에 치여 해마다 노동자 몇 죽은 것은 가십으로 뭉갰다. 물론, 속도 서비스를 소비하기에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일자리가 창출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목숨 값, 저녁이 없는 삶의 비용은 반영하지 않았다.


다시, 배달비가 비싼가? 나는, 그렇다. 소비자가 된 나는 배달원의 사정과 무관하게 음식값 20% 안팎의 배달비를 지불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음식 배달을 시키지 않았다. 필요가 아니라 편리를 구매하는 것은 애초에 대중이 아니었다. 풍요의 시대, 편리를 구매하고 싶다면, 그것도 없어져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 서비스를 누리고 싶다면, 그에 적정한 값을 치르면 될 뿐, 불만을 제기할 일은 아니다. 내가 항상 편리를 누려야 한다는 자기중심성은 뻔뻔하다.


더군다나 음식 배달 문화는 지구에 유해하다. 미세먼지에 시달리다 보니 기후 위기의 주적으로 중국을 꼽지만, 탄소배출량을 인구수로 나눠 보면 2020년 기준 평균 한국인은 평균 중국인보다 1.57배 더 나쁘다. 평균 한국인은 세계 4위의 기후 테러범이다. 중국의 탄소배출량은 우리 소비를 위해 탄소 배출을 중국에 하청 준 결과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은 숫자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지구 민폐국이고, 미세먼지는 지구촌 시대의 인과응보다.


음식 배달은 지구 민폐 시민의 소소한 악습 중 하나다. 2005년에는 그릇이라도 수거했지만, 이제는 일회용품을 쓴다. 노동에 적정 가격이 매겨질수록 일회용품 사용은 사용자와 소비자의 이득이었다. 이해득실을 따질 때 지구를 소외시키고 보면 쓰레기 대량 생산 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했다. 소비자는 시장논리로 죄의식을 가렸다. 배달 음식을 먹는 것이 그 한 끼가 생산한 쓰레기를 상쇄할 효용을 가지는지 묻고 싶다.


물론, 답이 정해진 물음이다. 그래서 배달비가 더 비싸졌으면 좋겠다. 그것은 배달 노동에 합당한 가치를 돌려주는 일이자 배달 수요를 줄임으로써 일회용품 쓰레기를 줄여 지구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다. 내게 편리할 권리가 있다는 착각, 나는 늘 맛있어야 한다는 이기심을 철회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의 제로섬 게임에서 사라질 다음은, 인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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