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사는 집들
인간을 세일하던 시기가 있었다. 상점들이 크리스마스, 새해, 감사, 몇 주년으로 앞다퉈 행사할 때, 인간도 세일가를 요청 받았다. 노동자는 다투지 않아도 몸값이 떨어졌고, 몸값이 떨어져서 저임금 자리라도 얻기 위해 다투었다. 동성로에 가득한 %를 따라 번화가를 관통할 때, 머리통과 몸통이 빗금으로 나눠진 기분이었다. 머리통과 몸통도 서로의 할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옷처럼, 화장품처럼, 우리는 재고가 거의 확정적이었다. 자영업자도 스스로를 세일 중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절망을 모른 척 능청떨 수 있을 때였다. 길가에 함부로 풀어둔 노래는 밝고 흥겨웠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일할 재고조차 없어졌다. 공실은 여전히 팬데믹 중이다. 1층에 전염된 ‘임대’는 치료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뽑기방으로 연명되었다. 2층, 3층의 사정은 조금 더 암담했다. 5층에서 내려다 본 동성로 건물은 이미 남루했다. 외관은 인테리어로 깔끔했지만, 옥상과 건물 사이는 방치된 ‘옛날’로 지저분했다. 신축 건물이 들어설 상상이 들지 않았다. 동성로 중심이던 대구백화점마저 2021년 폐업한 이후 회생하지 못했다. 대구는 십 수 년째 인구 순유출 전국 상위권 도시였다. 특히 2024년 20대 순유출은 광역시 중 1위였다. 대구의 정확한 지명은 수성시와 기타 등 등에 수렴했다. 수성시마저 미분양 물량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2024년에 신축된 만촌힐스테이트 상가의 절반 이상이 비었다.
임당동은 기타 등 등에서도 바깥의 동네다. 2025년 최근 거래 기준, 만촌힐스테이트(658세대)는 평당 4,416만 원이었고, 임당 코아루(148세대)는 582만 원, 강산애 아파트(299세대)는 555만 원이었다. 경산 바깥 쪽 면 단위로 넘어가면 평당 199만 원, 실거래가가 6,000만 원 안팎짜리 아파트도 있었다. 92년에 사용승인된 이 아파트가 재건축 리 없겠지만, 된다면 외국인 덕분일 것이다.
임당동 상가와 원룸의 공실은 외국인으로 채워졌다. 식당이나 식료품점, 외국인 전용 통신 가게는 물론, 베트남인들이 애용하는 당구장이 PC방만큼 많아졌고, 우즈베키스탄 사내들이 줄 선 이슬람 이발소까지 생겼다. 해물찜을 포장해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내가 마주친 한국인은 없었다. 경산 인구수는 2022년~2023년 1,100여 명 감소했다가 2024년에는 3,413명으로 증가했다. 내국인 193명, 외국인 3,220명이었다.
팬데믹 전에는 방학에 인터레이어 공사가 잦았다. 특히 술집이 몰려 있는 곳은 상호확증파괴하듯이 인테리어를 바꿔댔다. 지금은 간판들이 속수무책으로 낡아간다. 나는 길을 걸을 때 2층 위를 살핀다. 1층도 이름을 갖기 힘든 마당에 2층은 벌써 고층이다. 지하철역 1번 출구와 5번 출구 사이에 있는 7층짜리 신축 빌딩은 3, 5, 6층이 공실이다. 5번 출구에서 도로를 따라 250미터쯤 올라간 곳은 아예 공터다. 건물을 올릴 엄두가 나지 않을 법도 하다. 간판만 남은 허공이 지천이다. 공실은 대한민국 1등 프렌차이즈다.
상가 건물의 미래를 알고 있다. 스타벅스 3층에서 이 글 초고를 쓸 때, 건너편 3층 유리창 너머는 수 년째 텅 비어 있었다. 간판이 바뀐 적 없는 것 같으니 10년이 넘었을지도 모른다. 공실이 된 상가는 방치될 것이다. 빈 곳은 퇴색하고, 금 가고, 부숴져도 스산한 채로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간판만 남아 존재를 위장할 뿐이다. 간판의 진위에 아무도 관심없다.
원룸촌 곳곳도 비어 간다. 변두리의 빈집은 적나라했다. 아궁이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촌집’과 새마을 운동을 기억할 것 같은 양옥은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다. 내가 여기 오기 전부터 비어 있었는지, 내가 온 이후에 비었는지는 모른다. 특히 원룸촌이나 상가 사이에 방치된 촌집과 방치된 경운기의 사연이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공실도 많을 것이다. 밤길에는 불 꺼진 집을 센다.
몇 년 전, 사자 머리 손잡이가 녹으로 형체만 남은 빈집에 들어가 본 적 있다. 원룸과 원룸 사이 그늘로 대낮에도 음침했다. 습했고, 기분 탓인지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키 큰 나무가 햇볕 몇 줄기에 닿았다. 문풍지로 된 방문과 그 안쪽에 버려진 이불을 보니 선뜩했다. 그 집은 내가 임당동에 올 무렵에도 비어 있었는데, 문풍지가 거의 멀쩡해 더 기괴했다. 안쪽도 다르지 않았겠지만, 확인하지 못하고 나왔다. 지금도 종종 그 옆을 지나다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이 영원히 살지 않을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주 단위의 공허가 가슴에 푹 박혔다.
사람이 살던 빈집도 안다. 우편 취급소 인근 할머니 한 분이 살던 집이었다. 대문 안쪽에 가로로 마당이 있고 마당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중문이 달려 있었다.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방범에 신경쓴 듯했지만, 내가 도둑이라면 이 집에 들지 않을 것이었다. 훔쳐가기는커녕 주워가지도 않을 것으로 연명되는 일상은 마당에 모아 놓은 폐지와 재활용품으로 증명되었다. 할머니가 폐지 줍는 모습은 본 적 없지만, 폐지를 정리하는 모습은 힐긋 본 적 있다. 몇 년 전, 마당에 폐지가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인기척마저 없어졌다. 찌든 된장 냄새 같은 것도 휘발되었다. 나는 이사와 자연사의 차이를 애써 모른 척했다.
곧 생겨날 빈집도 안다. 내 동생 뻘 될 법한 2층 주택이다. 불 켜진 모습을 본 적 없었다. 1월의 밤, 담장 바깥에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던 집이었다. 죽음의 시간에 찍힌 삶의 마침표라 생각에, 퇴근길에 잠깐, 내 노년을 미리 애도하는 기분으로 서 있곤 했다. 어느 날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혼자 사는 노인을 상상했다. 대학 시절 월세로 살던 주택의 주인도 불은커녕 보일러도 아끼며 겨울을 버텼다. 지난 달, 건물 외벽 바닥에 시멘트를 칠하는 노인을 봤다. 내가 상상한 만큼의 연세였다. 무례하지만, 이 건물의 수명은 길어도 1n년 남았다.
임당동의 테두리는 과장 좀 보태 빈집의 촌락이었다. 주택가를 넘어가면 논밭과 과수원, 토마토, 포도 하우스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새 집을 지었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떠났을 것이다. 브런치에 댓글을 달아주신 분은 지인이 세놓고 떠난 빈집을 관리한다고 했다. 집은 지나치게 별 일 없었을 것이다. 별 일 없는 것을 먹고 감만 익었다. 내가 본 빈집이 그 분이 관리하시는 집인지는 모르겠다. 이 동네 빈 집에는 다들 감나무가 한두 그루씩 있는 듯했다. 가을이면 따먹을 사람 없는 감만 세월처럼 열렸다. 까막까치가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감은 물러터질 때까지 달려 있었다.
가장 좋은 이웃은 없는 이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 왔다. 나는 층간, 벽간 소음은 물론, 그 어떤 생활 소음도 내 방에 넘어오길 원치 않았다. 지독한 타자 결벽이다. 나는 통제 가능한 나만 허락하는 단독자다. 그러나 빈 것을 보다 보면, 타자와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은 타자와 함께 하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투정이라는 서늘함이 들었다. 빈집을 채워주는 자영업자와 외국인이 있어줘서 감사하다. 공실과 공실 사이에 살 수 있는 것은 고요뿐이다.
나는 여전히 빈방으로 돌아와 빈 것을 장미처럼 완성한다. 눈 맞은 장미는 언 것인지 피어 있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꽤 오래 붉었다. 나는 시들어 가는 붉음의 목격자다. 사실, 옆집과 아랫집의 공실을 바란다. 바라되, 그때는 나도 이곳을 뜰 날임을 안다. 지방대 붕괴는 속도의 문제일 뿐, 이미 정해진 계절이다. 계절은 반복되며 배터리처럼 확실히 닳아간다. 아무도 먹지 않는 감의 기분을 알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