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G 없는 이야기
옛날 옛적에, 나는 보부상이었다. 골목골목 마트 세일 전단지가 휘날릴 때, 배낭과 에코백을 들고 길을 나섰다. 1.5km 가량 떨어진 압량읍의 마트까지 기꺼이 걸었다. 마트에서 작심하고 세일하면 인터넷 할인가보다 더 쌌다. 라면, 3분짜장, 3분카레, 참치캔, 저가 햄 등 썩지 않는 것을 집중 매집했다. 평소에 먹지 않던 과메기나 제과점 빵도 살 수 있었다. 한 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언젠가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게 될 것을 예감했다.
마트는 치킨 게임 중이었을 것이다. 폭탄 돌리기 하듯 세일해댔다. 나야 고맙지만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마트는 많았다. 퇴근길에 내가 들릴 수 있는 마트만 세 군데였다. 압량읍에 아파트를 끼고 있는 먼 마트가 더 자주 세일했고, 우리 동네 마트들은 한 번 할 때 화끈했다. 주적은 인터넷이었기에 별 수 없이 당일배송이었다. 내 편리는 누군가의 고혈임을 알았지만, 나는 편했다. 기어이 마음이 불편할 때, 운동 삼아 걸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A마트는 배달은커녕 세일 없이 고고했다. 30미터 거리의 경쟁 마트가 폐업했다. 내가 임당동에 와서 처음 갔던 마트였다. 매장 규모가 4배는 넘었을 테니, 힘겨웠을 것이다. 길건너에 새 마트가 들어서서 세일 공세를 펼쳤을 때도 A마트는 ‘싱싱청과물’을 아는지, 별다른 대응하지 않았다. A마트의 반도 안 되는 규모의 새 마트는 자본력에 여유가 있나 싶었지만, 제 살 깎아 먹기는 1년을 못 넘긴 듯했다. 팬데믹 이후, A마트 기준 서쪽에 남아 있던 3개 중 2개가 폐업했다. A마트는 성업 중인지 모르나, 살아는 있다. 인근에 아시아 푸드 두 개가 개업했다가 몇 달 못 가 폐업했고, 지금 또 아시아 푸드와 할랄 푸드 전문점이 생겼다. 한국으로 일하러 와 자기 가게를 차린 호전성은 A마트 앞에 또 무릎 꿇고 말 것이다. A마트 안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로 포장된 식료품과 이슬람 문화권의 주식 같은 커다란 빵도 있다.
나는 지하철역과 집 사이의 B마트와 지하철역에서 가장 가까운 C마트를 주로 이용했다. 둘 다 A마트에 비해 조금 저렴했다. B마트는 원룸가 내에서 나름 번화가 특수를 누렸고, C마트는 대학 축제 때 한 몫 단단히 잡는 듯했다. 둘 다 캐셔 분들이 오래 갔다. 친절할 필요 없이 그저 캐셔였고, 나는 늘 손님이었다. 그들이 나를 인지할진 몰라도 나는 그들을 인지한다. 우리는 모른 척해주는 예의로 서로 안녕했다. 17년 간 딱 두 번 말을 섞었다. 그 중 한 번은 올해였다. 엄마 또래의 캐셔 분께서 깔깔 웃으시며 말했다.
“쟤들(외국인)이 내보고 누나란다.”
나는 계산 끝내고, 인사 끝에 괜히 덧붙였다.
“안녕히 계세요, 누나.”
캐셔 분께서는 신나게 웃으셨다. 그 이후 줄곧, 우리는 모른 척 중이다.
C마트에 있던 과장인지 실장인지 남자 직원을 대구 상인동 마트에서 마주친 적 있다. 캔커피 하나 사러 들어간 곳이었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동공이 잠깐 커진 걸 봤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상인동까지 가서 과외 전단지를 돌리던 내 신세와 대구 동쪽 너머에서 서쪽으로 이직한 당신의 안부를 나눌 법했지만, 우리는 묻지 않는 것으로 예의를 차렸다. 나는 당신이 운전하는 배달 차량을 타고 우리 집 앞까지 온 적 있었다. 어차피 배달 가야 하니 그냥 타라고 했었다. 우리는 일자리를 향해 우리를 배달 중인지도 몰랐다.
생수와 쌀이 배달 제외 품목으로 지정되더니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배달 자체가 사라졌다. 이게 옳았다. 짜장면 한 그릇 배달할 때의 짜증을 기억한다. 3,000원짜리를 배달하고 그릇까지 수거해야 할 때, 내 인건비가 산술되지 않았다. 단무지만 한 존엄성으로 나를 연명하던 시절, [태백산맥]의 한 구절을 좋아했다. - 하늘과 땅이 달라붙어 맷돌질 해 버렸으면 좋겠다. -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으그득으그득’이 있었던 기분이다. 상인동의 당신이 배달에서 놓여났길 바랐다.
1.5km 거리의 D마트와 F마트를 꽤 자주 걸었다. 압량읍에는 D마트가 먼저 있었고, 인근에 F마트가 다음에 생긴 것으로 안다. D, F마트는 오직 세일로만 등장했으니, 확실하진 않다. 비슷한 규모의 둘은 치열하게 몸값을 깎았다. 내겐 먼 동네의 전쟁이어서 둘을 구분하지 않았다. D마트 전단지를 보고 F마트에 가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전단지 자체가 사라졌다. 몇 년 간 그쪽으로 갈 일이 없었다. 12월에서야 동네 우편 취급소가 점심 시간에 문을 닫는 바람에 압량읍 우체국에 갔다가 F마트가 자리를 옮긴 걸 확인했다. 동네 우편 취급소 운영 시간을 확인했으니 다시 그쪽에 갈 일은 없을 듯했다. 전단지가 붙어도 이젠 굳이. 몇 천 원을 귀찮아 할 수 있는 권력이 생겼다.
아예 언급도 안 한 H마트도 있다. 내가 여기에 거의 가지 않았던 걸 보면 세일 전단지를 돌리지 않은 듯했다. D, F마트보다 가까웠지만, 우리동네에만 전단지를 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H마트는 내가 이 동네 오기 전부터 있었고, 팬데믹을 넘기며 폐업했다. 도롯가의 넓은 상가는 1년 이상 비어 있었다. 간혹 그 앞을 지나다닐 때 건물주의 슬픔을 생각하곤 했다. 자영업이 압살되는 시장에서 다시는 채워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 올리브영이 들어왔다. 이미 대학 정문 앞에 있는데, 주택가 생존의 영토까지 추가된 것이었다. 저렴한 생필품의 자리에 취향이 과잉된 사태가 달갑지 않았다. 풍요가 아니라 공포였다. 폐업한 마트의 절반 이상이 편의점으로 대체되던 때의 기시감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규격화된 편리를 약간 비싼 값에 구매하는 질서가 보편화된 것은, 바닥 생태계조차 계층화되었음을 의미했다. 묶음 세일 라면을 좇아 걷고, 당근마켓으로 명절을 뒤적이던 방식은 구식이 되었다. 대기업의 신식 질서가 공간을 장악하는 동안 ‘약간’을 확장하지 못한 구식 삶들은 공실을 닮아 갔다.
올리브영, CU, GS가 주는 취향과 편리는 이 동네 공간을 지탱하기라도 했다. 인터넷 마트들은 공간을 착취했다. 공간은 택배 트럭이 달린 거리로 대체되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살기 위해 쓰는 돈이 여기서 돌지 않고 저기로 넘어갔다. 빈 것이 늘 수밖에 없었다. 이커머스 본사가 낼 세금이 이곳에서 거둔 영업 이익 덕분이라면, 이곳은 피식민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살기 위해 지불한 부가가치세만큼은 지방세여야 했다. 이커머스가 소비자 주소지 기준으로 지방세를 납부하면 좋겠다. ‘누나’의 최저임금과 사라진 자영업자를 생각하면 빼앗긴 들에 봄은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C마트 캐셔 분과 말을 섞은 또 다른 사건은 길거리에서였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캐셔 분을 길에서 마주쳤다. 엄마 또래셨다. 왜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 뒀다고 했다. 어떤 안부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뭔가, 내 일처럼 답답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보통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공실이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리고, 나는 터치 몇 번으로 트럭을 타고 오는 보부상을 기다린다.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