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압독국

임당 유적 전시관의 재발견

by 하루오

박물관에 ‘우리’가 있는가? 취준생 시절 나는 삐딱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지배계급의 잉여였고, 나는 피지배계급의 자손이었다. 내 조부는 시골에서 땅 없이 살았으니 소작농,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면천된 노비였을지도 몰랐다. 외조부는 산골에서 약방을 했으니 잘 쳐주면 중인, 혹은 경험 많은 약초꾼이었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간 내 핏줄과 박물관은 교차되지 않았다. 잘 보존된 착취 주체의 유물에 자부심을 가지라니, 기만이었다. 박물관은 내 직계 조상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 위에 세워진 수정궁이었다.


취준생의 연장전을 살고 있는 나는 민속촌에도 기록되지 않을 신세가 한심했다. 내가 남길 유물은 책, 노트, 볼펜, 그리고 무수한 닭 뼈 정도였다. 천민의 책과 노트는 썩어 없어질 테니, 부수 기록이 없다면, 천 년 후 후손은 나를 볼펜으로 닭을 사냥한 사람으로 추론할지도 몰랐다. 사냥이라니, 골방에서 치킨으로 쾌락을 땜질하며 감히 치킨을 먹어도 되나 머뭇대던 잉여인간에게 감개무량할 영광이다. 우리 동네에 ‘임당유적전시관’이 시공될 때, 나는 박물관을 생각했다. 공사 소음 속에서 200년 전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과 나는 같은 혈통이었다.


완공된 건물은 삐딱하게 보기 힘들었다. 하얀 뼈대에 통유리 외관은 그 자체로 깔끔했다. 디자인 전문가의 손을 탄 흔적은 이 누추한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예뻤다. 테라스와 연결된 카페가 들어서도 어울릴 것 같았다. 무허가 주차장으로 쓰이던 공터가 공원으로 바뀐 것은 감지덕지였다. 잔디와 나무로 채워진 초록은 옳았다. 특히 밤에, 공원 안쪽까지 켜진 조명 덕분에 으슥한 골목길의 기표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곳은 돌봐지는 곳이었다. 인구 감소 지역인데도, 세련됐다.


완공 이후, 다시 삐딱하게 봤다. 공원은 개방해도 될 텐데, 알 수 없는 ‘안전상’의 이유로 접근 금지를 표시했다. 아,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행정의 냄새, 에라이, 그럼 그렇지. 더럽게 비싸게 구네. 이젠 취준생 신분이 아니었지만, 취준생 시기의 트라우마 탓에 배제의 기미에 민감했다. 접근 금지 옆을 매일 지나다녔다. 내게 가깝지만 먼 것, 국가는 그랬다. 예쁘고 비싼 게 내 것인 적 없으니 이 또한 자연스러웠다.


개장했을 때는 가지 않았다. 내가 국가의 관심사가 아니듯, 역사도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심지어 압독국은 듣도 보도 못한 국명이었다. 괜히 사람만 붐벼 시끄러울까 걱정했지만,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유료 주차장이 비어 있을 때 묘하게 흡족했다. 차가 없으면 나무와 잔디의 여백이 안온했다. 여백에 시간이 고이면서, 임당유적전시관은 우리 동네가 되어 갔다. 나는 나무와 잔디를 좋아했다.


개장 5개월 만에 가 봤다. 스케줄이 꼬인 이른 귀가길이었다. 어차피 집에 가 봐야 별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연휴라 가족 단위 방문객이 꽤 있었고, 무려 무료였다. 천 원이나 이 천원쯤 지불할 용의가 있었는데 무료라니, 일말의 경계심이 무너졌다. 애초에 임당유적전시관은 나를 배척한 적 없었다. 나도 참 얄팍한 인간이었다. 공짜 앞에 하나하나 다 예뻐 보였다. 임당유적전시관에 대한 내 최종 평가는 객관적이지 못할 것이다.


전시장 관람 경험이 거의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멈칫했다. 옛날 냄새는커녕 외관보다 더 현대적이었다. 정면과 좌우 한 층을 통째로 채운 스크린에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완공과 개장 사이의 지나친 공백은 납득되지 않은 채로 괜찮았다. 전시관에서 안내하는 동선을 따라 천천히 유물을 훑으며 안내문을 읽었다. 가야나 신라에 비해 부족한 사료로 최대 전시 효율을 구축한 듯했다. 그래서 임당유적전시관은 진정성의 전시장이었다. 경산시는 정말, 뭔가를 해보려 한 것이었다. 나는 18년째 원룸에 머물며 포기한 동네에서.

알고 보니, ‘듣도 보도 못한 압독국’이야말로 내 동네로 적합했다. 교과서에 들지 못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 과거다. 내가 이 동네에 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모를 역사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박물관 조사로 학계에 알려졌지만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1973년과 1982년 도굴되고 나서도 별 조치하지 않고 있다가, 1986년에서야 한국토지공사 택지개발사업으로 ‘훼손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서사’야말로 내 나라의 역사다. ‘K-’의 승리보다는 압독의 유폐감이 내 나라 애국가에 더 어울렸다.


압독국은 신라의 아류가 아니었다. 그동안 이 동네를 짝퉁 경주쯤으로 여겨 왔다. 임당동, 조영동 고분은 처음 볼 땐 신기했지만, 중요한 거면 유명해졌겠지, 막연하게 평가절하했다. 나를 하자 있는 노동자로 바라보던 사회의 시선으로, 나도 오래전부터 세상을 가해하고 있었다니, 조금 부끄러웠다. 내 편견대로라면, 나는 무덤 속에서 지나치게 오래 살아 있었다. 사실 골방에서 오래 잘근잘근 곱씹어 온 생각이었다. - 유명하지 않다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 세상은 나를 알려 하지 않았고, 모르는 것을 쉽게 누락시켰다.


임당 고분은 내부가 신라와 달랐다. 구조물을 짓고 그 위에 흙으로 덮는 신라와 달리, 압독국은 땅을 파 시신을 두고 봉분을 올렸다. 지금의 매장 방식과 유사하면서도 무덤이 조금 더 클 따름이었다. 신라일 수 없는 증거 앞에서, 오래도록 침묵하다 이제야 드러난 약소국이 측은했다. 당신들은 분명, 이 땅에 살았다.


전시관 안쪽엔 또 다른 상영관이 있었다. 입구처럼 암실에 삼면을 스크린으로 두르고 바닥에, 방석인지 의자인지 모를 1인용 푹신한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아무 데나 앉아 편하게 영상을 시청할 수 있었다. 압독국의 삶을 몇 분짜리 영상으로 담았다. 영상 속 사람들은 발견된 유골을 토대로 복원된 얼굴이었다. 못생겨서 반가웠다. 나는 경남과 전남의 혼혈이어서, 경북과 접점이 없었지만 우리는 다채롭게 못생겼다. 내 주소지에 당신들의 살던 영역이 오롯이 겹쳐졌다. 2000년 전 당신과 나는 못생김의 같은 혈통이었다.


고분에서 발견된 것들은 지배계층의 흔적이겠지만, 석기와 토기만 남아 권력감이 약했다. 잘 살아봤자 무덤을 크게 쓸 수 있는 권력이라면, 그다지 부럽지 않았다. 복원 중인 왕관이 제자리에 배치된다고 해도, 우리의 못생김은 강력했다. 바다 어류의 흔적이 피지배계층과 공유되길 바랐다.


나는 지금 널무덤이었던 곳 근처에 산다. 임당동 고분군에서는 볕이 따뜻한 겨울, 학생과 오래 통화했었다. 경북대 AAT 합격자인지 불합격자인지 기억나진 않는다. 조영동 고분군에서는 여름밤, 생각 정리하며 앉아 있다가 뒤늦게 온 대학생 커플이 꽁냥대기에 자리를 비켜줬다. 내가 없는 그 자리에서 대학생 커플은 2000년 전 당신들이 했던 것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18년째 이 방에 있다. 집이라고 하기엔 좀 작고, 무덤이라고 하기엔 좀 크다. 큰가? 볼펜으로 기록을 사냥한다. 임당동유적전시관은 가볼 만한 데라고, 남긴다. 여기는 경산시 임당동, 압독국이었던 곳이다. 일용직 노동자, 대학생, 외국인 유학생,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다. 밤에는 골목골목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더 많이 들린다. 우리 동네가 누락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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