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는 세 번 시작된다. 1월 1일은 결심의 시간이다. 그러나 다이어리에 파종한 마음은 작심삼일로 얼어죽기 일쑤다. 괜찮다. 아직 두 번 더 남았다. 음력설은 가족의 시간이다. 새 시간이 알던 사람으로 비좁다. 관습의 반복에 새것이 들 틈 없다. 조급할 것 없다. 최후의 시작이 남았다. 개학은 실행의 시간이다. 의지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몸이 낯선 공간에 파종된다. 낯섦에 뿌리내리는 수밖에 없다. 봄은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심리적 사건이다. 3월 2일이야말로 1월 1일, 전부 새것이다. 사람마다 날씨가 다르다.
봄은 ‘설렘’이다. 설렘이 너무 반짝이면 은근한 ‘기대’도 충분하다. 새 교과서의 잉크 냄새 위에 이름을 쓰고, 새 공책을 괜히 차르르 넘겨 본다. 읽어야 해서 차 있는 것과 써야 해서 비어 있는 것은 개학 직전에는 같은 계절이다. 새 연필을 깎는 사각사각 소리도 신선하다. 새 지우개로 지워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깝지만 신나서 달달한 향이 난다. 새 가방이나 새 옷도 새싹의 빳빳한 다른 형식이다. 새것의 생기만으로도,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마음이 앞서 달린다. 개학은 모든 새것의 명분이자 가능성의 시간이다.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새 학년, 새 반, 새 선생님, 새 친구, 그래서 나도 새것이다. ‘나’는 어제의 재생이 아니라 부활이다. 새싹이 돋는 땅바닥처럼 가슴 아래가 간질거린다. 내 이야긴 아니다.
내향인에게 봄은 스트레스다. 공포도 과장은 아니다. 겨울 방학은 안전지대였다. 익숙한 동선, 익숙한 얼굴 사이에서 나는 적당한 침묵이었다. 애써 구축한 내 세계를 매년 취소당했다. 갑자기 세계가 어색해져 버렸다. 나는 추방된 이방인이었다. 내게 보이는 것은 새것이 아니라 낯선 것이었다. 무고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안녕’해야 했다. 이름을 묻고 말하며 다시 관계의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낯선 이들 속에서 이름의 속을 채우는 일은 고역이었다. 등교 전 긴장했고, 하교 후 맥 빠졌다. 개학이 이끄는 봄의 장르는 ‘하이틴’이 아니라 ‘공포’다. 성향이 형벌이 되는 사태를 묵묵히 감내하는 일이 사회성 훈련이라 불렸다. 이 사회적 출생신고는 지나치게 전면적이다. 어항 물 갈아 줄 때도, 본래 있던 물을 일정 부분 남긴다.
교실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것은 알을 깨야 한다. 교실 문을 열기 직전, 교실은 어색함의 수용소다. 할 말 없는 사람들이 빽빽해서 할 말을 갖춰야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죄인이었다. 키 순으로는 16번, 가나다 순으로는 8번이 내 평균 수형번호였다. 나는 아직 공부나 운동을 잘하는 아이도 아니고, 웃기는 아이도 아닌, 오직 번호였다. 너희도 번호인데, 문 너머에서 너희는 말로 부풀어 올랐다. 웃음이 터질 때, 역시 개학은 형벌이었다. 한숨을 쉬었는지, 침을 삼켰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문을 열었을 때, 아이들이 나를 주목했는지 내가 아이들을 주목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와 어떻게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가기 싫은 것만 기억났다. 타인에게 말 거는 게 힘들어 봄은 숙제 같은 계절이었다. 봄이 지나야 비로소 편해졌다. 내향성의 계절로 번진 확장된 표현형, 봄이 싫었다.
봄은 설렘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품은 아브락사스(Abraxas)적 사건이다. 깨지 않으면 부패하고, 깨면 아프지만, 아프니까 성장이다. 개학은 알을 깨는 기회다. 나는 예의와 규범의 안쪽에서 ‘나’를 보호할 따름이었다. 두꺼운 세포벽만 지키고 있으면 나무도 나이테를 잘 두르지 못한다. 나무는 봄에 가장 빠르고 연하게 자라며 밝고 큰 세포 층을 만든다. 이를 ‘춘재(Springwood)’라 부른다. 개학이라는 강렬한 매듭이 있던 시절, 좋든 싫든 나도 해마다 춘재를 한 겹 남기며 성장했다. 세포벽이 두꺼워진 성인에겐 어려운 기록이다. 직함의 매뉴얼이 나를 앞설 때, 나는 닫히길 선택한다. 나는 아브락사스 살해자, 확장된 카인이다. 개인(開人)하지 못하는 밀폐된 개인(個人)이다.
나이를 먹고 보니 개학을 잃어버린 삶은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귀결된다. 작심삼일이 무한히 반복되어도 괜찮다. 시간은 시작 없이 이어지기만 한다. 일정은 빽빽해도 삶은 구획되지 않는다. 나이테 없이 세포가 커지는 시간은 성장이 아니라 비대해지는 노화다. 봄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화사한 풍경 때문이 아니라 알을 깨고 나갔던 ‘마디’가 갖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는 스트레스로 묶인 내 희미한 마디다. 봄은 시간의 개학이다.
봄에 모든 존재는 옳다. ‘있는 것’은 ‘없는 것’과의 어색함을 이미 감내한 결과다. 죽음은 생이 처음이고, 생은 죽음을 몰라, 알이든, 뿌리 끝이든, 새싹이든, 꽃봉오리든, 세계를 열어젖히는 일은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봄은 알 바 아니다. 생이 사방팔방에서 자기주장으로 시끄럽다. 모두가 소란하면 소란하지 않아서 모두가 어색해도 모두가 어색하지 않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의 질문이자 대답이다. 그저 있으면 되는 시간, 가만히 있어도 어울려지는 시간에, 나는 생각이 많다. 봄은 확장된 아벨의 시간이다. 아벨은 연둣빛이다. 연둣빛은 살아 남으면 초록으로 물들어 팽팽한 생으로 자라날 것이다. 봄과 몸은 다르지 않다. 봄의 말은 생각이 아니라 몸의 표현형이다. 생각을 그만 두고 봄 속에, 그저 있으면 된다.
내 장르가 ‘드라마’가 아님은 안다. 아마 ‘다큐멘터리’일 테고, 말년에 ‘공포’로 반전되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내 손으로 밥 벌어먹는 특권으로, 기꺼이 방관한다. 내 봄엔 수강생이나 늘었으면 좋겠다. 이름으로 남을 아이도 있을 것이고, 잠깐 수강생으로 스쳐 지나갈 아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수집한 이름들이 내 강사를 설명한다. 강사 아닌 나는 이름이 없다. 내 어항에 이름 몇이 빠지고 수강생이 채워진다. 안전한 물갈이라서 나는 헌것이다. 5년 전, 10년 전에도 하던 일이다. 기다리지 않는 개학이 온다.
봄이 언제였더라. 나는 무척 괜찮다. 심리적 사실이다. 기만과 기적 사이,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