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 & No : 짚신의 정체성
내 연애에 희망을 거는 사람은 어머니뿐이다. 짚신도 짝은 있다고 하신다. 남녀 성비에서 남자가 더 많으니 통계적으로 틀린 말이다. 어머니는 고슴도치의 마음으로 통계를 외면하시지만, 나는 통계가 증명하는 루저다. 이 글은 마흔을 넘긴 악성 재고의 자아비판이다. 연애를 안/못 하는 사람은 찌질하다.
감정싸움 없는 혼자가 편하다는 방어 논리가 얼마나 빈약한지는 스스로가 알고 있을 것이다. 연애 상대가 차은우나 수지라면 감정싸움에 기꺼이 패배할 테니까. 그러므로 ‘혼자의 자유로움’은 차은우나 수지를 만날 수 없는 자기가치의 저렴함을 고백하는 것에 가깝다. 그들의, 아니 우리의 현실은 허장성세의 찐따다. 연애 공백 10년 하고도 몇 년 더, 나의 찌질력(力)은 sky는 몰라도 인서울 중상위 대학을 뚫을 정도는 될 것이다.
연애의 기본 논리는 거래다. 나의 가치와 상대의 가치를 평가하고 서로를 맞교환한다. 수요 강도와 공급 강도가 강력한 만큼 거래는 활발하다. 그럼에도 이 시장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소개팅 상대가 마음에 안 들 때, ‘나를 뭘로 보고!’라며 주선자에게 분노하는 지점에서 가치의 상품성의 상호 측정이 증명된다. 타인의 눈에는 딱 그 급의 인간인 것이다.
연애는 대학 입학 전형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남자친구 전형’, ‘여자친구 전형’ 지원자이자 심사자다. 지원자의 다양한 가치가 종합적으로 계산된다. ‘생물학 전형’, ‘경제력 전형’은 없지만, 생물학적 조건과 경제력 반영 비율은 압도적이다. 내신이나 수능 점수로만 대학을 뚫듯, 외형과 경제력만으로도 여러 전형에서 중복합격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아마 우리는 외형․경제력을 모두 갖춘 차은우나 수지의 대척점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형의 난감함은 기준의 모호함에 있다. 외형과 경제력의 비중이 높은 것 같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 신념, 성격, 성향, 취향, 취미, 화법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된다. 주체와 대상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가중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당사자도 자기 가치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보통 사후적으로 밝혀진다. 영영 모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시장이 자기 객관화의 시장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내 기준이 불확실하듯, 타인의 기준도 불확실하므로 타인의 평가는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불확실 안에는 ‘나의 외부’라는 다른 차원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고, 다양한 각도의 외부에 측정되다 보면 나의 대학 간판처럼 나의 객관적인 등급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나이가 들수록 기준의 정밀도는 올라가니 타자에 의한 자기 객관화의 신뢰도는 점점 높아진다.
비연애는 자기 객관화 기회의 포기선언이다. 남들이 뭐라든 ‘난 나야.’를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물론 친구 사이나 취업 시장에서도 자기 객관화가 이뤄진다. 그러나 친구 사이는 기준이 지나치게 느슨하고 경쟁률이랄 것도 없고, 취업 시장은 기준이 지나치게 높고 경제적 가치만 반영해서 신뢰할 수 없다. 1:1에 수렴하는 성비에서 자신의 전부를 맞교환하는 적나라한 연애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어른들은 전쟁 중에도 애 낳고 살았다고 한다. 위급상황에는 성욕과 위기감이 급등해 서로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매수세가 강하니 낮은 입찰가에도 계약이 체결되는 시장 논리와 같다. 그런데 현대는 매수세조차 약하다. 성욕을 비롯한 대부분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대체제가 풍부하다. SNS와 넷플렉스로 외로움이 그럭저럭 위로된다. 언 발에 오줌 누기 형태겠지만 오줌은 무한히 쏟아지고, 갓 나온 오줌은 따뜻하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는 10년 간 연애 시장에서 물러나 있었다. 다른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시작은 경제적 빈곤이었다. 88만원이라도 버는 것이 목표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돈이 생겼을 때는 시간이 없었고, 돈과 시간이 생겼을 때는 소설가가 되겠다며 방구석에 틀어 박혔다. 그러는 동안 혼자에 길들여졌다. 실제로 연애 욕구랄 것도 없었다. 그러다 마흔 살, 펜을 꺾고 보니 웬 초라하고 뚱뚱한 사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제 밥벌이 하며 꿈을 좇는 환상 속에 머무는 동안, 현실의 나는 성실히 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연애가 하고 싶다, 이렇게 중얼거리고 보니 나는 순식간에 객관화되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감당해야 할 경제력은 따라 잡았다. 그뿐이었다. 프리랜서의 수입은 인맥과 상관관계가 높은데도 은둔형외톨이 생활패턴을 고수해 앞날이 불안정했다. 생물학적 완성도는 10년 전에 비하면 상품성이 처절하게 떨어졌다. 팔자 주름이 깊어졌고, 피부의 탄성이 죽었고, 무엇보다도 완연한 비만이었다. 운동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숱은 아, 마이페시아. 경제력 흑자로 생물학 적자는 보전되지 않았다. 한 때 백화점에 있었을 나는 아울렛과 땡처리 창고 사이에 처박힌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영혼의 폐쇄성이 증대된 것이다. 일상에 내 취향만 반영하는 습관은 동질성을 비만하게 키워 이질성에 대한 면역력을 떨어뜨렸다. 연애란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것과의 조우인데, 나는 내가 허락하는 범주를 벗어난 상대의 속성을 인정하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화(化) 된 너’일 뿐인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요구하는 것은 퇴행적이고 이기적이다. 내게 온전히 맞춰주는 반려견 같은 반려자는 없다. 내 몸의 비만보다 내 마음의 비만이 더 심각한 것이다.
길에 떨어진 5만 원짜리는 똥이 묻어 있어도 주워가기 마련이다.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우리는 등급의 차이가 있을 뿐 루저나 찐따 부류의 폐기물들이다. 아니라는 인지부조화는 스스로를 기만할 뿐이다. 나와 같은 등급에 속한 사람과의 연애? 차라리 혼자 살고 만다. 짚신이 자기가 짚신인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니 짝은 영영 없다.
나는 짚신벌레다. 연인이 없다. 저기 내 방구석이 내 무덤이다. - 엄마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