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

by 하루오

1. Yes : 차단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관혼상제


나와 처세 거리를 맺고 사는 사람들의 식구들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기 귀찮다. 사실 처세 거리에 있는 당사자의 죽음도 연예인의 죽음처럼 ‘그랬어?’ 수준의 가십으로 정리될 판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은 내 감정에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다. 나와 무관한 사람의 죽음이 함부로 내 일상을 파괴하는 관습이 짜증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식구들의 죽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당사자지 그의 식구가 아니다. [응답하라 1988] 시절에는 친구를 사귀면 그 집 식구들과도 알고 지냈지만, 지금은 친구와 개별적으로 관계할 뿐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슬퍼하므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하겠지만, 내 감정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슬픔에 공명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와 무관하다.


결혼은 더 거슬린다. 슬픈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감정의 파산을 돕는 만족감이라도 있지만, 내가 없어도 기쁠 사람에게 축하를 건네는 것은 부자에게 삥 뜯긴 기분이다. 결혼식에 참석하면, 나는 당신들만의 행복을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결혼식에서는 최소한 대사 한 마디 있는 엑스트라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나와 처세 거리를 맺고 있는 사람의 결혼에서 나는 축의금 봉투와 박수 데시벨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결혼식은 대체로 주말에 잡혀 휴식을 방해했다. 주말에는 데이트, 가족 모임, 취미생활, 보고 싶었던 드라마 정주행,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평일에 처세의 가면 안에서 소모되었던 ‘나’를 충전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청첩장은 이 모든 계획을 파괴하고 함부로 참석을 명령한다. 사회성의 최소한을 발휘하기 위해 꼬박꼬박 참석했지만 부당함에 굴복하는 기분이었다.


상부상조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내 어머니의 죽음이 누군가의 민폐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사실 그런 날이 온다면 누군가에게 연락할 정신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북적거림으로 슬픔을 상쇄하는 시스템의 효율성까지 부정하지 못하겠다. 아직 겪지 않은 일이어도 그 효과는 상상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어머니의 죽음이 그들의 인생에 아무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일은 납득이 안 된다. 우리가 눈물 거리로 관계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슬픔에 위로를 강제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결혼은 더 민폐다. 비혼이 증가하는 시대에 미혼자는 축의금을 상환 받을 수 없다. 평생 볼 친구들한테야 문제가 아니다. 그들로부터는 돈이 아니라 우정으로 상환 받게 되고, 그것은 돈보다 가치 있다. 그러나 업계를 떠나면 보지 않을 사람들에게 내는 축의금은 돌려받을 가능성이 없다. 설령 뒤늦게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이미 단절되다시피 한 인연에 결혼을 알리는 것도 구차하다.


대학 졸업 후 선배들이 결혼을 해댔다. 당시에도 나는 전공과 무관한 길을 걸으면서 과연 내 결혼식에 이 선배들을 초대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결혼 이후 10년 이 넘도록 그들과 사사로이 연락한 적 없다.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라 밥벌이 생태가 그러했다. 서른 즘에는 경제적/성격적 이유로 내가 결혼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했고, 그 이후로는 관계의 세금을 내는 기분으로 동기들과 지인들의 결혼에 참석했다.


나는 마흔을 넘겨, 노총각도 무안한 비혼자가 되었다. 결혼을 안/못하는 인간들은 나름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인간들이 누릴 수 없는 행복의 문을 열면서 이들에게 축하를 강제하는 것은 관습에 기대어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이다. 이제는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잦아질 나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제발, 무소식이고, 무소식이길.



2. No : 이기적 소통


1:1 수업 30분 전에 카톡이 왔다. 이제 수업 그만 듣겠단다. 정시가 불안해서 일단 수능에 집중하고 싶단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받은 맥 빠지는 연락이었다. 이 수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날 외출할 일이 없었다. 너는 끝나는 순간까지 이런 식이구나, 차라리 후련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약속한 수업 직전에 시간 변경을 요청해댔고, 내가 카톡을 보내면 거의 확인하지 않거나 대답이 늦었다. 심지어 이 날 수업도 이미 한 주 밀린 상황에서 내가 전날 밤 10시에 전화를 걸어 잡은 시간이었다. 그 전화조차 그날 오전에 보낸 카톡에 대답이 없어 기다리다 못해 건 전화였다. 이 학생이 심한 편이었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소통하는 학생이 느는 추세다.


머리만 이불에 처박고 자기가 숨었다고 생각하는 서너 살짜리 아이들 같았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지 않고 있는 것을 아는데도 집에만 가면 카톡 확인이 더뎌졌다. 학생들은 몰랐다, 카톡 확인을 잘 안 한다, 다른 뭔 가를 확인하고 있다로 얼버무렸다. ‘자니?’로 치근덕대는 것도 아니고, 수업 일정 변경이나 과제 수행 정도를 체크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학생들의 무소식에 나만 속 터졌다.


나와 학생들은 MZ세대로 묶이지만 M세대와 Z세대는 선호하는 소통 도구가 달랐다. 나는 전화가 편했다. 메시지 전달을 해야 하는 시각에 완료할 수 있다. 그러나 카톡은 메시지 전달 완료 여부를 기다려야 했기에 답답했다. 반면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을 선택하는 카톡을 선호했다. 할 일을 하고, 빈 시간에 몰아서 답장을 보내는 식이었다. 학원 때문에 별수 없는 방식이지만, 하루를 넘기는 답장은 심했다. 심지어 대학생이 된 학생은 자기 연인과도 그런 식으로 소통했고, 그 소통 방식에 만족해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날 나도 아랫세대와 벽이 쌓이기 시작했음을 실감했다.


내가 전화나 카톡에 환장하는 사람이냐 하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화통 붙들고 있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전화는 지금 여기에 없는 누군가가 갑자기 지금 여기의 내 일상을 중단하고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막무가내로 요청하는 일이다. 업무상 전화는 필요하지만 길어지는 잡담은 피곤하다. 내 연인이 아닌 한, 통화가 20분이 넘어갔다면 나는 전화를 끊고 싶을 것이다. 안부 확인은 그 정도면 충분했고, 나는 지금 여기의 빈둥빈둥이 더 중요하다.


나는 그저 예/아니로를 듣고 싶다. 길어봤자 영어 교재 다이얼로그 길이의 대화로 사실 관계만 확인하면 된다. 그마저도 피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무례다. 내게 꼰대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학생들이 내 소식에 무소식으로 대응한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로또 복권을 살 뿐이다. 당첨만 되면 너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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