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 대하여)
1. No(1) : 공감 꼰대
공감의 뿌리는 경험이다. 어떤 남자의 급소에 강한 타격이 가해지는 것을 본 남자들은 서로의 급소가 이어진 것처럼 거의 동시에 움찔하곤 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너에게 내가 오롯이 포개지는 것, 공감이다.
공감이 꼭 동일한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감정과 판단 사이의 길목에 접속 부사 ‘그래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있다. ‘그래서’로 이어질 때는 대상에 동조하게 되어 우리가 흔히 아는 온기로 대상을 품는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이어질 때는 대상을 비난하며 차갑게 바라본다. - 많이 아프지? 나도 아파봐서 알아. 그런데 그게 이렇게 궁상 떨 정도는 아니잖아. - 꼰대의 전유물인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동일한 작동 방식이다.
누군가가 내게 우울감을 토로할 때, 나는 양가감정에 시달린다. 왼쪽에서는 감정과 증상의 세부를 맞춰가며 당신의 상태를 몸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당신은 꽤 괜찮은 구석이 있는 사람임을 환기시키고, 나는 당신 편이라는 확신을 주려고 노력한다. 우울의 끝 근처에서 오래 머문 경험이 그들의 마음 지도를 훤히 보이게 만들어준 덕분이다. 최소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로 예의를 차림으로써 우울을 덧입히지는 않는다.
오른쪽에서는 그래서 어쩌라고, 어차피 다른 사람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알아서 일어서야지, 하며 당신을 한심해 한다. 나 역시 그 우울의 구렁텅이 속에서 아무 도움 없이 스스로 벗어났다. 같은 조건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당신이 자살이라도 한다면, 그건 인과율일 뿐이다. 자살은 자기 인생을 망쳐버린 자신에게 내리는 최후의 권선징악이다. 우울의 중심에서 자살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누군가 나 대신 실현하는 것을 직관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다행히 좌우는 동등하게 대립하지는 않는다. 나는 왼쪽을 따르는 멀쩡한 사회인이다. 내 판단과 무관하게 나는 어느 순간에도 왼쪽을 연기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같은 경험 속에서 아니, 나보다 더 괜찮은 조건 속에서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일 때, 오른쪽이 불쑥불쑥 탐지될 때가 있다. 나는 공감이 만든 괴물, 마음의 꼰대다.
2. No(2) : 공감 폭력
이성은 선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한다. 이성은 선(善)의 경계를 벗어난 것들을 응징할 뿐이다. 감성 없는 이성은 악을 닮아가기 쉽다.
감성은 정의가 아니라 선을 추구한다. 감성은 선의 경계를 넘어간 것도 품는다. 그 결과 선의 경계가 모호해짐에 따라 악이 조장된다.
이성이 책임감이 강하다면, 감성은 무책임하다. 종종 이성이 결여된 감성이 무책임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사례를 본다. ‘내 감정이 상했으니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태도는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 너와 사귀는 중에,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말다툼을 하더라도 내가 쩔쩔매는 결말로 귀결되는 사태로 경험했다. 아마 너는 우리의 일에서조차 옳고 그름의 경계를 칼 같이 긋고 사태를 또박또박 따지는 나를 차갑게 느꼈겠지만, 나는 너를 통해서 이성이 결여된 공감의 포악함을 깨달았다.
다양성의 시대, 공감은 개인 인격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성이 결여된 공감이 집단화 되었을 때, 집단은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변한다. 이곳 대구에서는 아직도 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 석방 서명을 종종 볼 수 있다. ‘부모 잃고 외롭게 자란 우리 공주님’의 연민으로 연대한 무리는 초등학생에게도 조롱받지만, 당사자들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 무식한 사람이 감정으로 빚은 신념은 가련하고, 무섭다.
3. Yes : 부모를 경험하지 않고서 부모가 되기를 욕망해야 하는 역설
어렸을 때, 나는 부모들의 희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저 고생을 하지 않을 텐데 괜히 나를 낳고 사서 고생이었다. 감사하기도 했지만 미안하기도 했다. 요즘 학생들도 내 나이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 따위는 하지 않겠단다.
요즘은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감사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시시해졌다. 줄어든 성욕처럼 욕구도 발기부전 비슷한 비활성 상태로 전환된 탓이다. 뭘 해도 쾌락이 예전 같지 않다. 세월의 풍파에 감정의 세밀함도 마모된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는 다양하고 소소한 것들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것이 좋아지지 않는다. 듣던 노래만 들을 정도로 익숙해서 편한 것만 찾았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로 하여금 맹목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유도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종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선택이므로 필연적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양육비를 들여 살 맛을 구매하는 것이다. 의무감만으로 부모의 희생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 희생에 동반되는 쾌락을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쾌락을 부모가 되기 전에는 느낄 수 없으니 미혼자들의 비혼 선택은 합리적이지만 비합리적이다.
쾌락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미래와의 교감 없이 현재의 독단적 판단으로 이행하자니, 쉽지 않다. 나는 너무 오래 머뭇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