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은 때, 떠나지 못하는 우리들. 도대체 여행은 무엇이기에
반은 프리랜서지만, 반은 늦은 대학생으로 사는 나도 종강을 맞았다.
원고를 써야하는데 쓰지 않은지 꽤 오래됐다. 조금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하지 않은지도 오래였다. 바로 전 주까지 꼭 끝내야하는 일을 마쳤다. 6월 30일 밤.
왠지 7월 첫 주에는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떠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곧 제주에 장마전선이 생길 예정이라는 일기예보를 보았다.
제주에 내렸다. 7월 1일 저녁.
비가 온다던데 비는 오지 않고,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나에게는 계획이 없다. 이 곳을 오기까지 나는 주저했다. 내일은 여행을 떠나자. 기왕이면 국내에서 가장 먼 곳. 제주를 가야지 결심하고는 그 다음날 늦은 점심에 일어났다. 일어나서 대충 씻고 배낭에 옷 두 벌에 3일치 기초생활 물품을 넣었다. 김포 공항으로 가는 동안 자리가 있는 비행기 중 가장 빠른 출발 1시간전 표를 바로 주웠다.
비행기 입구에는 신문들이 있었다. 바로 전날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회담이 있었고, 신문들은 저마다 이 소식을 중요하게 다뤘다. 신문을 들고 비상구 옆 복도 쪽 내 자리에 앉았다. 창가 쪽에는 아시아계 외국인이 탔다. 딱히 할 말은 없어서, 비행기 입구에서 가져온 신문을 읽었다. 가져온 신문의 1면부터 마지막면까지 훑었다. 어느덧 도착 20분 전이다. 옆자리 외국인이 말을 건다. 영어할 수 있냐고. 나는 한국어 할 줄 아시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 사람에게도 영어가 모국어 같지는 않았다. 그래 한국어는 공용어가 아니니까. 잠시 뇌정지 후. "리를 빗..?"(조금...?)이라 말했다. 아무튼 내리는 20분 동안 내게 가능한 수준의 영어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 분은 덴마크 코펜하겐에 사는 사람이고 휴가를 맞아 아시아를 여행 중이라고 한다. 싱가폴-홍콩을 거쳐 한국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시아계 사람이어서 가까운 나라 사람인줄 알았는데 역시 편견은 무섭구나. 덴마크 사람들은 영어를 잘한다던데 정말인걸까. (이것도 편견인지 모른다!)
아무튼 코펜하겐에서 온 분이 제주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틀 후 페이스북으로 한라산을 하이킹할 생각이니 같이 가자기에 나는 전혀 준비가 안되었다는 명분 좋은 거절을 했다.) 도착한 첫 날 행선지는 없으니 일단 시청으로 가는 아무 버스를 잡아 탔다. 어느덧 8시. 시청 근처에서 밥을 먹고, 근처 남는 아무 호텔방을 아주 값싸게 찾아서 첫 밤을 보냈다. 제주의 첫 날이 끝났고, 일어나서는 동쪽으로 떠나는 아무 버스를 잡아타고 아무튼, 떠났다.
혼자하는 여행의 매력은 아무래도 가능한 최대의 의외성 같다. 함께하는 일행이 없고, 계획이 없다면 여행의 의외성은 더더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수준이 된다. 첫 날은 제주시내, 그 다음날은 동쪽. 아마도 그 다음날은 남쪽, 마지막 날은 서쪽으로 떠나볼까 한다.
이 글을 쓰다 문득 생각한다.
이렇게 떠나기 쉬운데, 왜 나는 떠나지 못했던 걸까?
사실 여행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어떤 나이를 살고 있든 일상에서 저마다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은 학교를 가고, 직장인은 직장에 가고, 프리랜서도 일을 해야한다. 당장 할 일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무언가 할 일은 생긴다. 무엇을 배우든. 돈을 벌 무엇이든. 우리 각자는 적어도 1인 몫의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는 이유로 사회 속 일상의 '자리'를 지킨다.
여행은 일상의 부재. 그리고 이어지던 일상의 단절을 의미한다. 나에게도 그렇겠지만, 나의 자리 역시 그렇다. 내가 없는 자리에는 나의 부재로 인한 멈춤이 생긴다. 자리가 퍽 중요할 수록, 그 시간이 꽤 길어질 수록 멈춤으로 인한 여파는 커진다. 나의 떠남으로 누군가는 나의 일을 더하게 되고, 나의 부재가 타인에게 피해는 아닐까 염려도 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멈추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그런데 함께 여행할 이가 많아질 수록 부재한 일상의 자리는 더 커진다. 여러 사회 속 일상들이 멈춘다. 여러 일상이 멈춘다는 것은 그 영향도 더 커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주저한다. 일상 속 나의 부재와 단절이 불러올 멈춤. 그것은 애써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로 충분하다.
물론 나의 부재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아서, 나 하나쯤이야 떠나도 세상은 아무래도 괜찮을런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든 정말 그렇든, 부재가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인 사람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부재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는 다양하고 충분하다. 고교 시절에는 어딘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다. 여럿은 물론이고, 혼자는 더더욱 그랬다. 흔히들 떠나는 가족 여행조차 그랬다. 모든 가족이 떠나는 여행은 고교 입학 전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딱히 불화없는 우리 집인데 말이지. 나는 여행이 의식적으로 무지 낯선 사람이었다.
나는 20대 초반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애써 여행을 떠날 이유, 그러니까 일상을 벗어나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일상의 모든 것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일상 밖에 만족이 있다는 보장은 없으며, 또 여행에는 일상의 인력을 벗어나기 위한 큰 '탈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일상에서 감당해야할 책임(이라 쓰고 '짐'이라 읽는)의 질량이 크다면, 필요한 탈출 에너지는 더욱 커진다.(질량이 큰 만큼 중력은 강해지고, 그만큼 강한 로켓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 하루 일상을 살아내기도 벅차서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나기 어렵다. 엄두가 안난다는 말이 적절할까. 평생 자동차 정비를 해온 아버지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삶의 대부분 시간에서 여행은 내게 비상식은 아니나 비일상적이고, 비정기적이며, 낯설어서 그것을 굳이 감행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일상을 탈출하는데 필요한 많은 에너지. 여행을 가지 않을 너무나 명확하고 '합리적인' 이유들. 그런 이유로 나는 대체로 내가 사는 인천/서울/경기도 밖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군생활조차 서울에서 의경으로 보냈으니, 나는 좀처럼 멀리 떠난 일이 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애써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나의 부재동안 나는 더 행복하고 더 배워야하고 무언가 의미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떤 이들은 그냥. 슝 여행을 잘 떠났다. 그들에게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 걸까?
누군가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가 여행에서 배웠다는 것은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세계일주를 떠난 이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인가? 나도 지도 밖으로 행군해야할까?
여행이 무슨 별 거라고 이렇게들 난리들이람.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일상의 관성과 강력한 인력. 여행은 애써 일상의 관성을 끊고 그 인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람마다 이 관성과 인력은 다를 것이다.(달을 벗어나는데 필요한 힘은 지구와 비교하면 1/22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탈출 에너지'도 다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여행은 사회적이다. 나의 부재로 인해 나의 존재를 나와 다른 이들이 인식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특히 그렇다. 여행을 떠나면, 우리의 일상 속 부재로 인해 누군가의 일상은 어떤 형태로든 조정된다.
로켓이 발사될 때도 기상과 인력이 최적인 시기가 있듯, 여행하기 좋은 때는 나에 대한 1인 몫의 사회적 책임과 관성이 가장 적은 때일 것이다. 그래서 입시 끝난 고3과 방학 중인 대학생 시기도, 군대 입대와 전역 전후, 입사와 퇴사 즈음, 은퇴한 노년의 한 때에는 여행을 많이들 떠난다.
한창 공부해야할 때, 일해야할 때. 여행은 큰맘 먹고 떠나야 한다. 이 시기 떠나는 여행은 길게 떠나기 어렵다. 며칠에서 길어야 일주일이다. 적어도 몇달이나 년 단위가 걸리는 세계 일주라든가 '지도 밖 행군하기'는 아무나 감행하지 못한다. 이쯤되면 여행은 단순 여행이 아니라 긴 여정이다.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회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닐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현실이니까.
게다가 안정화된 일상에서보다 여행에는 돈도 제법 든다. 떠나는 수단에도, 먹고 마시는 것에도 때로는 입는 것에도 돈이 더 든다. 아무튼 여행을 떠나는 시기와 길이는 일상 속 부여된 책임의 정도와 주머니 사정 아래에 있다. 자 그럼에도 당신은 여행을 떠났다. 이제 이 여행은 어떤 여행이어야 할까? 물론 일상을 떠나는 것으로도 충분한 의미이고 보상일 것이지만 여행에서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떠나면 더 좋을 것 같다. 소중한 당신의 여행은 언제나 있는 이벤트는 아니니까. (나의 여행은 1년에 한 두번이다.)
여행을 떠나기전 혹은 여행이 충동적이라면 떠나면서
나는 다음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한다.
여행의 목적을 단순히 쉼, 체험, 유랑, 탐험이라는 단어로 한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이 단어들에 가까운 주된 목적/기대가 대부분일 것이다. 제주 여행동안 올레길 5개는 걷겠다는 사람은 체험과 탐험(말하자면 사서 고생)에 가깝고, 온갖 맛있는 것은 다 먹고 오겠다는 사람은 유람-쉼-체험의 적절한 블렌디드를 기대한다.
언젠가 어떤 친구가 베트남으로 떠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럼 야시장도 가고, 절경인 하롱베이에도 가고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더니 자신은 다낭에 있는 '하얏트 호텔'에 가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베트남 다낭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로 떠나는 것이고, 앞서 말한 베트남의 이모저모를 볼 생각은 없는 것이다. 다녀와서 물어보니 정말 한 일주일 정도를 호텔 안에서만 쉬는 것과 그 인근 구경 정도로만 보냈단다. 이러한 여행을 가치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일상을 떠나면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
여행의 목적은 같은 곳에 같은 시간을 떠나는 동안에도 여행의 모습을 너무나 다르게 만든다.
누구와 떠나느냐에 따라 여행의 목적과 장소는 퍽 달라져야할 것이다. 여행의 기대가 비슷한 이와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함께 떠나는 이에 맞춰 여행을 편집해야한다. 이러한 이유로 불확실함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나는 보통 나의 여행은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과 떠났던 해외여행은 고생! 고생이야! 라는 절규를 제법 많은 주변 지인들에게 들었다. 대체로 2030의 해외여행은 호캉스(호텔에서 보내는 바캉스)가 아니라면, 유람과 체험이 중심인 걷고 또 걷고인데 부모님 세대의 체력과 여행에 대한 기대는 우리 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또 여행지에서 각종 예약과 의사소통을 책임지는 충실한 가이드 역할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함께 여행할 이와 여행의 기대와 목적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이 좋겠다.
템포 : 명사. 일이 진행되는 빠르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할 수 없다면 보통은 서두르게 된다.
여행의 템포는 얼마나 여행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있느냐와 연관된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의 길이는 얼마나 돈을 포기하느냐, 돈을 쓸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부재하는 시간은 그만큼 일을 덜하게 된다는 것이고, 여행지에서의 생활은 보통은 일상에서보다 돈을 더 많이 쓰게 된다는 것이니까. 이렇게 일상의 관성과 인력은 여행의 템포까지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과연 인력은 시간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빠른 템포가 싫다. 적어도 여행에서 만큼은 결단코.
어떤 여행지에 단 하루 이틀만 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또 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면, 하는 것 마다 밀도는 낮아진다. 여행지에서 걷지 않고 뛰게 된다. 자세히 보지 못하고 슝슝 지나치게 된다. 일상이 조급한데, 여행에서까지 조급하다면 사유하고 느낄 시간이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가능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려 한다. '가능한 많은 것 보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보는 것은 보지 않는 것보다 좋을 수 있으니까. 단지 내가 그렇지 않을 뿐이고, 나는 그저 하나를 진득하게 보고 체험하는 것이 좋을 따름이다.
아직 파리에 가보지 않은 나는 에펠탑에도 가보고 싶고, 루브르 박물관에도 가보고 싶다. 몽마르트르도 오르고 싶다. 지도를 보니 거리가 제법있어 짧은 시간동안에는 모두 제대로는 못볼 것 같다. 나의 여행 스타일은 시간이 없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루브르 박물관과 다른 하나 정도를 진득하게 보고, 다음에도 파리에 와서 다른 곳을 가봐야지 한다.
이렇게 느린 템포로 버스를 타고 걷는 나는 같은 여행지를 몇 번이고 다시 가고는 한다.
부산에는 홀로 7번을 떠났는데, 갈 때마다 새롭고 나도 모르는 낯섦이 있었다.
나의 관심은 넓이보다는 깊이로 향한다.
제주 동쪽 광치기 해변에서는 어스름이 내릴 무렵에 가서 해가 지고 별이 뜰 때까지 있었다. 그 다음 날 성산일출봉을 향해 걸으면서는(2km 남짓이고 짐도 배낭 뿐이라 걸을만했다.) 낮의 광치기 해변을 보았다. 제주 바다도 제법 조수간만의 차가 있어서 저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질문은 <불확실함을 얼마나 마주할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이다. 계획으로 불확실함은 상당 부분 줄어든다. 여행지에서의 불확실함은 뜻밖에 멋진 기회를 찾는 가능성이 될 수도 있지만, 크게 실망하게 되거나 위험한 순간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특히나 위험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떠나면서, 계획하지 않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우리는 베어 그릴스가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위험과 안전은 꼭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은 낭만이 아니다. 나는 무모하게 '지도 밖으로 행군'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안전한 여행지에서 나의 시간과 일정의 주인으로 좋을만큼 계획하고 불확실성에 놓이는 것이 좋다.
경험 상 떠나는 수단, 머물 곳에 대한 계획의 대강 정도는 미리 세우는 것이 좋았다. 여행 예산도 절감되고 여행지에서 얼마나 불확실함을 마주해도 좋은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국내로 떠나는 대부분 여행에서는 계획을 많이 세우지 않았는데, 감당할만한 괜찮은 불확실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행의 떠나는 것, 일정에서 나는 얼마나 주체일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나의 여행은 보통 저지르는 것이었다. 일상의 인력이 약해지고, 일상의 관성을 멈출 수 있을 때 나의 여행은 저질러졌다. 여행지에서만큼은 자유롭게 부유하려 노력했다. 마지못해 가야할 것 같은 여행은 가지 않았다. 나의 일상은 아무때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의 여행은 소중하다.
나의 여행의 주인은 나여야만 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여행 그 자체에만 너무 심취한다. 여행에 도취된 이들은 여행의 관성에 휘말려 여행 혹은 여행하는 자신에게 과몰입해버린다. 여행에 빠진 이들은 일상을 견디지 못한다. 자연히 역치도 높아진다. 이들은 남들이 가지 않은 곳과 하지 않은 여행 방식에 몰두한다. 여행을 떠나온 자신은 너무나 자랑스럽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듯 여행을 패션처럼 사용하지만, 그 패션에는 사실 자기가 없다.
여행이 허영심의 충족, 인정이나 자기 과시의 수단이 되는 것이 온당할까.
여행의 주인은 여행이 아니라, 타인이 아니라 일상의 인력을 이겨낸 '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행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어쩌면 예술에 바라는 바와도 같다. 어떠한 단기적 유용성이나 투자 대비 효용과 이익 회수. 이러한 관점에서 따지면 예술도 여행도 참 ROI(투자수익률)가 안나온다. 그러니까 예술이 예술인 것처럼 여행은 여행일 것이다.
어쩌면 여행은 유용할지도 모른다. 일상의 부재와 단절은 나에 대해 더 잘알게 한다. 나의 부재를 느끼는 타인에게도, 일상 밖 나에게도. 관찰하려면 대상으로부터 어느정도는 떨어져야 하는데 좋은 여행은 관찰에 좋은 거리감을 준다. 갈 길을 찾는 이에게는, 특히 창작자에게는 여행은 참 좋다.
어설픈 창작자인 나도 이번 여행에서는 무언가 느끼는 바를 쓰리라 마음 먹고 노트북과 종이 노트를 챙겼다. 말하자면 나는 여행지에서 일상의 작업을 이어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 사실 여행지에서 진득하게 쓰는 것은 좀 어렵다. 굳이 방법이 있다면 어디 가둬두고 쓰는 방법 정도일 것 같다. 예전에는 출판사에서 호텔 방을 잡아놓고 작가를 가두어 글을 쓰게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공간이 다른 일상의 연장이랄까.
제주도에서의 둘째날.
진득하게 쓰기는 포기했다. 대문호인 작가들은 언제 어디서든 작업을 이어갔다는데, 나는 그런 그릇은 아닌가. (아무튼 이 글의 첫 머리는 쓰고 돌아왔다.) 여행지에서만 가능한 어떤 감성이 존재한다. 느끼고 남기는 것. 그곳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 진득하게 쓰기 대신 보고 경험한 것들을 틈틈이 짧은 문장으로 작은 노트에 적고, 지나는 풍경과 소리들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담았다.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복귀하면 적응을 위한 조정기가 있다. 여행지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의 중력에 다시 적응할때 즈음, 여행 기록을 정리했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 여행 기록 정리하기를 좋아한다. 여행에서 일상을 돌아보기 좋은 것처럼, 일상에 돌아와서야 그 여행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어찌나 기록을 많이 남겼는지 언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느꼈는지 정리하는데 꼬박 2일이 걸렸다.(제주에서는 일주일 간 10장의 메모를 쓰고 800개의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기록을 정리하면서 어떤 순간의 의미는 보다 또렷하게 다가왔다.
제주 여행 3일차. 우연히 찾아간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같은 직장 동료를 짝사랑하는 여행자, 시험장에 들어서면 연기하지 못하는 성우 지망생, 15일째 올레길을 여행하는 퇴사자, 국가대표 목전에서 부상을 입은 입대 예정자, 사업 실패로 들어간 공장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던 게스트하우스 사장. 그 날 우리는 같이 노래하고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바다 앞까지 달려가 무어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에는 몰랐다.
돌이켜보니 환상 같은 순간이었다.
다시 그 순간을 만나지 못할 지 모르겠다.
이 글의 마침표를 찍으면, 제주 여행은 비로소 끝이 난다.
이번 여행의 불확실성에는 예기하지 못한 환상성이 있었다.
이 글을 적는 지금. 지나와서야 그것이 또렷이 보인다.
한편 돌아온 지금
떠난 동안 나의 부재는 돌아온 일상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상의 인력과 관성은 강해져
바다는 만조가 되었다.
떠나고 싶지만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일상의 인력과 관성이 약해지면
모를 일이지만.
아
여행을 떠나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