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대화>
"나도 알고 있거든! 아는데 왜 자꾸 말해?
그렇게 말하지 마!"
5살 난 아들의 3종 세트.
엄마가 잔소리하거나, 다짐을 받으려고 말을 하면 돌아오는 메아리.
예를 들어,
초콜릿 먹고 꼭 이빨 닦아야 해.
초콜릿은 저녁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2절까지 하면 큰일 납니다.
곧바로 외침이 들립니다.
"나도 알고 있거든! 많이 안 먹으려고 했거든!
양치할 거거든!"
탄생 5주년도 안 된 녀석이 되받아치는 반항심(?)에 벌써 잔소리쟁이가 된 기분이 듭니다.
아이유의 '잔소리' 노래가사가 들려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머리 아닌 가슴으로 하는 이야기"
"네가 싫다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이야기"
정말 어디까지가 잔소리일까요?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는 아들에게 하는 소리도 잔소리가 되는 걸까요?
1절까지는 잔소리가 아니고, 2절부터는 잔소리인 걸까요?
01.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또는 그 말.
02.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게 꾸짖거나 참견함. 또는 그런 말.
그렇다면 두 가지 방점을 찍어볼 수 있습니다.
나의 말이 '쓸데없이' 하는 말인가, 나의 말이 '필요 이상으로' 하는 말인가.
쓸데가 없다는 건 엄마의 감정토로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듣는 이에게 없고, 말하는이에게만 기능을 하는 감정적 말들.
예를 들어 "넌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라는 말은 듣는 이로부터 대답을 원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말하는 이의 답답함을 토로하기 위한 말이죠.
토.로. 마음에 있는 것을 죄다 드러내어서 말한다는 거죠. 감정까지 죄다 드러냅니다.
그러나, 드러낼 뿐 돌아오는 답변이 애초에 없는 말이니 채울 것이 없는 말입니다.
결국 쓸데없는 말이 됩니다.
반면 '필요이상'은 몇 번을 의미하는 걸까요?
1번 이상이면 필요 이상일까요?
한국인은 삼세 번이니까 세번 이상이면 필요 이상인 걸까요?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정리해 보자면, 기준은 발화자와 수용자가 정하는 게 가장 좋을 듯합니다.
즉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라면 엄마와 아이가 정하는 거죠.
한 번에 정해질 리도 없고, 정해져도 한 번에 지켜질 리도 없음은 국룰입니다.
다만 적어도 정해 보는 '과정'을 함께 해보는 거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 필요이상의 기준을 정해봅니다. 몇 번이 필요한지요.
'간식은 밥 먹고 난 다음에 먹자'는 말은 간식 먹고 싶다는 아이의 의사표시가 있을 때 딱 한번.
'밥 먹고 양치하자'는 말은 밥 먹고 나서 한번, 자기 전에 한번.
정신건강의학자(주 1)의 말을 빌리자면, 아니라고 합니다.
나르시시즘(나의 우월함)의 표현, 본인의 불안(너 정말 내 말 들었어?)의 표현, 노화의 징후(나이 들수록 같은 말을 계속합니다), 사랑과 관심(실패하지 않았으면 해서, 더 많은 걸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등), 정리가 안된 불명확한 사고(논리 없이 말이 길어지는 경우) 부모와의 자기 동일시(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잔소리를 그대로 따라 함).
뼈 때리는 분석입니다.
"아이는 어리고, 나는 어른이니까. 어른인 내 말을 들어야 해"라는 우월함에서 종종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레고놀이를 하느라 등원시간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엄마는 "지금 빨리 나가야지! 그만 놀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아이가 말합니다.
"지금 레고 정리하는 건데? 장난감 정리하고 외출하는 거잖아"
엄마는 현재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우월함에서 잔소리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불안에서 잔소리가 기인하는 경우는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TV를 보여줍니다.
"이것만 보고 자는 거다?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알았지? 이거 끝나면 바로 딱 끌 거야! 안 그러면 엄마 진짜 TV 전원 다 뽑아버린다?"
똑같은 말을 강도를 높여가며 크레센도로 잔소리를 해댑니다.
끝나면 끄면 되는 건데요.
엄마는 애초에 TV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불확신,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아이가 떼를 쓸 경우 자신의 통제력에 대한 불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불확신은 곧 불안감이 되고 잔소리의 땔감이 됩니다.
노화는 넘어가겠습니다...
사랑과 관심의 경우도 도를 지나치면 이기적인 사랑과 관심이 되겠죠.
사랑은 관계성으로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완성되는 거니까요.
정리가 안된 사고는 본인의 신념이 없어서입니다.
넘쳐나는 육아법들을 섭렵하다 보니, 그것도 유튜브나 인스타에 돌아다니는 짤들을 통해 육아법을 팝콘처럼 소비하다 보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저도 한 때 그랬죠.
그럼 이때는 이소리를 했다가, 저때는 저 소리를 했다가 왔다 갔다 합니다.
잔소리도 듣기 싫은데 일관성 없는 잔소리는 그냥 소음입니다.
부모와의 동일시는 어떨까요?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내면의 아이'와 마주해야 하니까요.
절대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했던 아들이 그와 똑같은 아버지가 돼있는 경우.
절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던 딸이 그녀와 똑같은 어머니가 돼 있는 경우.
왜 비극은 되풀이되는지를 생각해 보자면,
프레이밍의 무서움 때문입니다.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세요의 원리.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코끼리라는 프레임을 활성화시키죠.
우리는 언어를 통해 프레임을 인식하고, 또 무의식 속에서 그 프레임이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진 말아야지,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순간 그 프레임이 똑같이 활성화됩니다.
그러나 그 활성화 버튼을 끄려면, 단순히 '부정'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그를 초월할 수 있는 '긍정'의 프레임을 새로 만드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잔소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중 가장 강력한 긍정의 잔소리 프레임엔... 언어가 필요 없습니다.
아이와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마는 엄마의 모습은 가장 강력한 무언의 잔소리입니다.
'우리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아이의 신념이 곧 자신과의 약속도 지키는 신념이 됩니다.
그건 엄마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통하는 뼛속 깊은 잔소리로 작용하죠.
저요?
저도 그렇게 못합니다.
아직 아이의 뼈는커녕 살에도 닿지 못한 잔소리 쟁이입니다.
다행인 건, 이렇게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한 잔소리쟁이라는 거죠.
어렵겠지만, 엄마가 못 할 일은 지구상에 없으니까.
엄마가 무조건 이기는 솔선수범의 강력한 잔소리를 실천해보려 합니다.
(주1) 정신의학신문(김세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201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