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아침, 유난히 평화로웠습니다.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던 아들이 7시 반이 다 되도록 잠을 자고 있었죠.
‘후다닥 아침밥’을 차리고 등원까지 한큐에 하고 나니, 오히려 허전했습니다.
익숙한 소란이 없는 아침이 이렇게 낯설 수가 있을까요.
“이상하게 오늘따라 평화롭더니만…”
출근해 휴대폰을 본 순간, 그 평화는 깨졌습니다.
그날은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 게재일이었죠.
연재는 늘 같은 시간에 올라오지 않습니다.
어느 날은 눈뜨자마자 업로드 알람이 울리고,
어느 날은 정오가 지나서야 알림이 뜹니다.
예전엔 혹시 편집국이 잊은 건 아닐까 싶어 문의를 해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압니다.
기사의 시의성과 배치 상황에 따라 업로드 시간이 달라진다는 걸요.
그날은 새벽부터 업로드가 된 날이었습니다.
막 출근해 컴퓨터를 켜려는 순간,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오마이뉴스입니다. 연락 바랍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문득, 기사에 댓글 알람이 잠깐 스쳐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죠.
응원도, 비난도 가끔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건데요.
이번엔 느낌이 달랐습니다.
편집국에 전화를 걸자, 기자님이 조심스레 말씀하셨습니다.
“댓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사 내용 일부가 잘못되어 정정이 필요합니다.”
손끝이 떨렸습니다.
무엇을 잘못 썼다는 걸까.
급히 기사를 열어보니,
‘노년 부양비’의 정의와 해석이 잘못됐다는 댓글이 여러 개 달려 있었습니다.
읽는 순간, 바로 알겠더군요.
정말 제 해석이 틀려 있었습니다.
휴대폰 검색창을 켜고 통계청 자료를 뒤졌습니다.
빨리 고쳐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 개념은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잘못된 건, 고쳐야죠.
문단을 덜어내고, 정의를 다시 세우고,
흐름이 어색하지 않게 문장을 다시 잇습니다.
그리고 1:1 문의 게시판을 통해 정정을 요청했습니다.
10여 분 만에 [기사수정] 표시가 달렸습니다.
안도한 것도 잠깐, 곧 또 한 통의 문자가 왔습니다.
“오마이뉴스입니다. 편한 시간에 연락 바랍니다.”
‘편한’이라는 단어가 괜히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평소 편집국 문자를 하루에 두 번이나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점심시간이 되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담당 기자님이 반가운 목소리로 받으셨습니다.
“편집국에서 모니터링하다가, 연재의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드리고 싶어서요.
지금 기자님이 잘못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이런 부분이 좀 더 보완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편하게 말씀드리는 거니 오해는 마세요~
그리고 새로 준비 중인 공동연재에도 한 꼭지 써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습니다.
편집국이 제 기사를 꼼꼼히 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느끼던 글의 고민도 정확히 짚어내셨죠.
그 말을 들으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아, 더 단단히 써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정정 하나로 시작된 하루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독자들은 참 똑똑하다.”
그 생각이 하루 종일 맴돌았습니다.
사실 제 기사를 많이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겨우 아홉 번째 연재에서 스스로 지쳐 있던 참이었죠.
그런데 누군가는 읽고, 또 정확히 짚어줍니다.
결국 위기는 이렇게 찾아오고,
기회도 그렇게 찾아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문장이 비슷해 보이는 때가 옵니다.
누가 내 글을 읽을까 싶고,
쓸 이유도 희미해집니다.
그러다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누군가는 돌을 던지고,
누군가는 나침반을 건네줍니다.
쓸 거면, 제대로 쓰라고.
볼 거면, 제대로 보라고.
돌이켜보니 그마저도 감사한 기회입니다.
둘 다, 내가 계속 글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체력이 좋든 나쁘든, 펀치가 세든 약하든
링 위에 서 있어야 선수라 불립니다.
달리기가 빠르든 느리든,
결국 출발선에 서야 기록이 남습니다.
때로는 매너리즘이 불쑥 찾아오지만
그럴 땐 그냥, 매너리즘이든 게으름이든, '함께 가는’ 게 답일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잘 달릴 순 없으니까요.
다만, 링 위에서 사라지지만 마세요.
경주에서 번호표를 떼지만 마세요.
우리, 그렇게 계속 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