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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

광화문 광장의 잠재적 시위자

by 카르멘

어느 날 저녁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사회주의자가 된 거 같아 ”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응, 곧 광화문 광장 나갈 거 같은데?”


나이 마흔을 앞두고 나는 내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그 당시(라고 해봤자 겨우 몇 달 전이지만)

겨우 세팅해놨던 일과 육아의 균형판이 깨지면서

“아, 이놈의 대한민국!!!”을 가장 많이 외쳤다.

“아, 이망할놈의 대한민국, 이러니 애를 안낳지”

“아, 이놈의 나랏일 하는 사람들은 애를 키워 봤나? 누가 그냥 키워줬겠지!”

“아니, 애를 키우라는거야, 일을 관두라는거야?!!!!”


쓰다 보니 또 살짝 올라온다.

내안의 火

(우리남편은 내가 ‘화요일’에 태어난줄 안다...)


아무튼 회사에서 하루 8시간 근무, 가정에서 하루 6시간 육아를 병행하는 건

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하나 골랐다.


그냥 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머니, 광화문 광장 나가시기 전에 읽으세요’ 라고.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신의진)


01. 내가 쓸 수 있는 패를 찾아라


적응하기로 마음먹고 상황을 보면 '패'가 보인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암담한 상황도 거리를 두고 보면 어슴푸레 길이 보인다.

당신이 일하기로 선택한 것은 당신의 행복을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로 불행한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 말라.

그 말을 하기 전에 오직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따져서 최선을 다하라.

큰 산을 오를 때에는 정상이 얼마나 남았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한 걸음에만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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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쓸수 있는 패는 3개 였다.

회사를 관두든가, 육아휴직을 다시 하든가. 육아기단축근무를 하든가.

복직후 1년 동안 도우미선생님을 타의로(선생님이 관뒀다) 2번 변경하고 난 후의 내가 쥐고 있던 패들이다.


회사를 관두는거? 못했다. 집에만 있을 자신도 없고 당연히 경제적 수익이 필요했으므로.


육아휴직을 다시 하는거? 안했다. 우리회사는 총3년(1년 유급, 2년 무급)의 육아휴직을 쓸수 있는데 1년 6개월을 이미 썼으니, 나머지 기간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써야한다고 워킹맘 선배들에게 수도없이 들어왔다. 초등학교때는 아이가 12시면 집에 온다...


이렇게 가지치기 하고보니 내 마지막 패가 보였다.

육아기 단축근무.

총1년을 쓸수 있는데, 처음 도우미 선생님이 관뒀을 때 3개월을 썼다.

그때 우리회사 인사담당자에게 문의해보니, 총3년의 육아휴직 중 단축근무 기간이 차감되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쓰린속을 부여잡고 썼다.


두 번째 도우미선생님이 관두기 직전, 우리회사에 CEO와 소통하는 창구가 생겨서 나는 질문을 하나 했다. ‘육아기 단축근무 기간이 왜 육아휴직에서 차감되야 하나요?“라고..

노무사의 검토를 거쳐 돌아온 답변은 “차감되지 않습니다. 단축기간과 휴직기간은 별도입니다”

유레카!

그리고 답을 구하기 무섭게 도우미 선생님이 또 그만뒀다.

내가 쥐고있는 패는 여전히 하나였고, 다행히도 육아휴직기간에서 차감되지 않는 단축근무신청서를 썼다.


‘지금 여기’서 할수 있는 일.

육아기 단축근무 제도의 실체를 우리회사 누구도 제대로 몰랐기에 내가 직접 고용보험에 질의 한 것,

회사에서 적용되는 과정에서 혹시 잘못된 게 없는지 사장에게 질의해 노무사 답변을 구한 것.

그래서 내가 쓸수 있는 가장 합리적 패를 쓴 것.

내 앞의 한걸음만 집중해서 만든 최선의 길이었다.


02. 3년만, 우선순위대로 살자.


다시 오지 않을 3년. 총력전.

돈 더 벌 생각 3년만 접어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할 때지만 체력 빼고는 욕심을 버리자.

지금의 3년은 다시 오지 않으며, 이때 아이와의 애착에 문제가 생기면 두고두고 더 큰 비용을 치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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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패를 내밀 때, 가장 기준이 됐던 문구다.

물론 지금 내가 승진할 건 아니지만, 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래도 될까?

다른 동료들은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회사에서 야근하는데

나만 정시퇴근 하다못해 회사에서 유일하게 단축근무까지 써도 될까?

주변동료들에게 민폐인이 되는건 아닐까?

나라고 왜 이런 생각을 안했겠는가...


하지만 위의 수많은 질문들이

아이의 3년을 회사 눈치보느라 흘려보내도 될까? 라는 질문을 이기지 못했다.


03. '뱀의 뇌'에게 말을 걸지 마라


공포, 불안을 느낄 때 가동되는 뇌를, 일하는 엄마들은 수시로 느끼는데

이때 억누르기 보다는 알아차리는 '인간의 뇌'를 가동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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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맘을 쓰면서 뇌관련 서적을 많이 읽게됐는데 그래서 대충 설명이 가능해졌다.

인간의 뇌는 뇌간, 변연계, 대뇌피질로 이뤄져 있는데 뇌간은 뱀과 같은 파충류도 갖고 있는 생명의 뇌고, 변연계는 포유류가 갖고 있는 감정의 뇌, 마지막으로 대뇌피질이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의 뇌다. 그런데 워킹맘들은 하나의 변수만 발생해도 아슬아슬하게 짜놓은 일과 육아의 밸런스가 깨지다보니 ‘생존의 뇌’ 부위가 과활성화된다. 사실은 생존을 위협할 위험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차리게 하는 대뇌피질이 작동되지 않는거다.

내가 그랬다.

물론 지금도 종종 나는 뱀이 되곤 한다.


04. 죄책감 프레임 벗어나기


대한민국 모든 엄마들의 병. 죄책감.

특히 일하는 모든 엄마들의 고질병. 내탓하기.

아이가 아플때는 백프로.

하지만...

아이가 아픈것은 엄마 탓이 아니다.

아이를 '불쌍하게' 보는 엄마의 색안경은 아이를 진짜 '불쌍한' 아이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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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지긋지긋한 워킹맘의 불치병.

애가 코가 흘러도, 팔이 부러져도, 가끔은 열이 나도 보낸다. 어린이집.

애가 컨디션이 좋을때만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생각하면, 거의 못보낸다고 봐야한다.

마스크 쓰며 생활하는 애가 불쌍했고,

누런코가 주륵주륵 흐르고 눈꼽까지 끼는 애가 안쓰러웠고,

아이가 열이 날 때 애를 걱정하기보다 내가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내가 우스웠다.

더 웃긴건 이 모든 상황이 거의 매달 반복된다는 거다.


나도 미혼이고, 미출산일 땐 상상할 수 없던 일상이다


하지만 이책과 같은 선배 워킹맘들이 말해줬다.


“당신이 회사에 나가든 안나가든, 애는 아픕니다.

애가 아픈건 바이러스 때문이지, 일하는 엄마 때문이 아닙니다. 엄마는 바이러스가 아니니까.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 그 자체가 아이에게는 살아있는 교육입니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살아있는 교육자로서 출근한다.


아이가 걷기까지 2천 번의 실패를 한다고 한다.

엄마가 제대로 된 엄마로 걷기까지도 못해도 2천번의 실패는 할 것이니까.


매일 후회하고, 자책해도 2천번은 아직 안했겠지 하고 위로가 되어준 책, 신의진 교수님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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