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정렬을 잃은 내몸의 정렬을 맞추는 곳이니. 몸의 정렬을 맞추다보면 마음의 무질서함도 정리가 된다.
그리고 집안에 레푸기움은 남편방이다.
육퇴를 하고나면 보통 저녁9시 정도인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그래서 남편방에 내몸을 뉘인다.
(안방에선 아기가 자고, 거실에선 소리를 낼수 없고, 작은방은 아이의 놀이방이라 뉘일 공간이 없다보니 어쩌다보니 우리 부부의 휴식처가 남편방이 됐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남편과 야식을 먹으며 수다를 떤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게 휴식의 레푸기움은 남편방.
04. 매장과 파종의 차이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돼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어둠속 빛이 한줄기도 보이지 않을 때.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저 밑바닥으로 뿌리내려 계절이 되었을 때 꽃피우고, 삶이 열릴 수 있도록.
매장이 아닌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현재의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 한때 내꿈이 매장됐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마도 성인이 된 후 첫 시련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당연히 갖고 있던 꿈이 실현되지 않자 악마에 영혼이라도 팔고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내가 쓴 일기에 그렇게 써있더라...
진심이었다. 그때의 내감정이 기억난다.
아마도 그때 악마가 나타나서 거래를 제안했다면, 난 수락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나는 인생의 테마를 바꾸기로, 그냥 그것만 쫓고 살기는 지긋지긋해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글쎄 그때는 그걸 ‘파종’으로 생각하진 않고 그냥 ‘순응’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
그러고나니 시간이 좀 지나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던 재능이나 적성 등이 완전히 매장된 건 아니다.
다른 형태로 다른 발아로 나타나긴 했고, 지금 브런치도 그 일환이다.
그렇게 보니 ‘파종’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나는 ‘워킹맘’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체감하지만,
반대로 ‘전업주부’의 삶이 얼마나 답답할지도 종종 생각하곤 한다.
돈이 많으면 내가 전업주부를 할까?
돈이 있든 없든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내가 감내할 수 있을까?
아이가 크고 내소득도 내경력도 없으면 우울증이 오는건 자연스런 수순이 아닌가?
아이를 키우는 동안 경력단절이 되는 여성이 많은 걸 보면 아마 그들도 그들의 사회적 자아가 매장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재취업이 녹록지 않은 현실을 보면 실제로 매장에 가깝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인스타그램, 유투브 등의 새로운 창구가 발달하면서 전업주부들의 아이템과 기술이 소통을 넘어 상품화 되는 경우도 꽤 늘어났다. 이들에겐 그들 자신의 재능이 ‘파종’ 됐던 셈.
결국엔 끝까지 자신을 포기 하지 않을 것, 그리고 계속해서 두드릴 것.
이 두 가지 마음과 자세가 매장과 파종을 가름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05. 누군가를 안다는 것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걸어 올라가보는 것.
& 지금은 길눈이 밝아졌는데, 과거의 나는 100미터만 걸어가도 네이버 맵이 알려주는 위치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으면 돌아봤다.
잘못 찾은 거 아냐? 나는 그때부터 나를 못 믿고, 네이버맵을 못믿고, 네이버맵에 위치를 설명해놓은 가게주인과 온갖 후기 글들을 불신했다.
딱 50미터만 더 가서 고개를 45도 돌리면 나오는데, 그사이를 못 믿고 돌아서려한다.
그러니 한 사람을 믿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언어와 비언어적 요소로 소통하는 사람 사이에 편견과 불신이 들어서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온갖 기회비용, 거래비용을 들여가며 서로를 알아가야한다.
저자가 말했듯 그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일.
그러니 우리가 서로 같은 나라 말인데 왜 이렇게 못 알아듣냐며 언성을 높이고, 도대체 이해할수 없는 족속이라며 답답해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지구상의 일.
06. 셴파
셴파, 티베트어로 '붙잡히는 것' '생각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
모기물린 곳과 같이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다 결국 고통이되는 것.
고통은 우리를 떠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지금 당신의 셴파는 무엇인가.
현상은 아무 힘이 없다.
사실에 내가 부여하는 셴파만큼의 무게가 더해져 내 마음에 자리 잡을 뿐이다.
& 나의 셴파가 무엇인지 나는 명확히 인지한다. 다만 입밖에 내기 쉽지 않고 더욱이 활자화 하는 건 더욱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언젠가 브런치에 나의 셴파에 대해 쓰는 날이 오지않을까.
킬레가 또 데켕게 (힌디어;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
07.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길이 막히는 것은 내면에서 그 길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거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축복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
끝으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감은 그저 매일 계속 쓰는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게 아니듯 글쓰기가 쉽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