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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나의 만트라

by 카르멘

최근에 뜻하지 않게 머리(brain)에 관한 책을 연속으로 읽어서 사실 좀 지쳤다.

또한 당분간 육아서적은 잠시 거리두기를 해야겠다.

‘~해야한다’가 많을수록 스트레스 호로몬이 늘어나 육아효능감이 낮아지므로.


그래서 뇌를 이완하는, 명상할수 있는 책을 골라봤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예전에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읽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더욱 자주 던지게 되는 질문,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이 질문에 대한 책,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네 말이 내귀에 들린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01. 인생만트라

만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만(마음) + 트라(도구), 즉, 마음의 도구란 뜻이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는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다른 이는 듣지 못해도 나는 듣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단어는 무의식적으로 나의 정신을 부패시킨다.

'네 말이 내 귀에 들린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성경구절을 기억하라.


곰돌이 푸의 만트라는 누군가 혹은 자기자신에게 “오늘은 무슨 날이야?”라고 물었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야”라고 말하는 거다.


류시화님의 만트라는 “숨!”이다.


& 나의 만트라는 뭘까?

내가 최근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

생각의 끝에서 가장 많이 건져올린 문장은

“내가 선택한거야” 다.


“누가 시켰어?”라고 물을 때 “아니, 내 선택인데”라고 대답하는 것.

이 과정을 최근 1년간 가장 많이 했으니 지금 나의 만트라는 “내선택이야” 다.


이밖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자주 쓰는 부정적 말은 뭘까,

“왜~했어?” 인거 같다.

최근에 지인에게 들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왜’는 외국의 ‘왜(why)’가 아니라 ‘도대체 왜 그래의 왜“라고 한다.

이유가 진짜 궁금해서 던지는게 아니라, 못마땅하니까 따지는 ‘왜’.

내가 아들에게 쓰는 왜의 80% 이상도 그 왜인 듯.

부정적인 왜는 나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나쁜 만트라가 될수 있으니 최대한 의식적으로 쓰지 말아야 겠다.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

02. 축복 BLESSING 의 어원

BLESSING(축복)은 프랑스어 BLESSER(상처입다)와 어원이 같다.


"상처가 되는 경험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자기 존재의 방향을 찾기 위해, 즉 삶을 진지하게 살기 위해 당신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온 기회이다. 만약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것과 비슷한 또 다른 경험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영국 시인 W.H.오든)


상처는 우리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돌아보면 내가 상처라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있다.


그리고 잊지 말자.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다는 것도.


& 상처가 되는 경험,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는 10대 때의 경험이 나머지 평생의 삶을 좌지우지 하고, 누군가는 말하지 않으면 전혀 알수 없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 할순 없다.

티가 안난다고 상처를 받지 않은 것도 아니고,

티를 낸다고 넌 이제 남은생은 틀렸어 하고 재단할수도 없으니.

다만, 그 상처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좋든싫든 받은 상처는 내안의 흔적을 남기고, 흉터가 될수도 굳은살이 될수도 있다.


나는 선택할 수 없던 과거의 상처는 가급적 내현재와 미래에 굳은살이 될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내가 초연해(?) 보이는 것, 혹은 쿨해보이는 것은 아마도 과거 내가 지고있던 불안과 부침의 수련결과일 것이다.

삶의 파도들이 일어나고 가라앉게 두라. 너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너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03. 레푸기움

당신에게 그런 곳은 어디인가.

자신만의 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곳.

삶이 의미를 잃은 것 같을 때마다 당신을 부르는 곳.

신이 당신을 위해 지도 위에 동그라미를 표시한 곳, 자신만의 레푸기움.


라틴어로 레푸기움은 '피난처, 휴식처'의 의미이다.

원래 빙하기 등 멸종의 환경에서 동식물이 살아남은 장소를 말했다.


사람들에게도 자신만의 레푸기움, 자신의 탑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그곳에서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멈추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류시화 작가의 '새는 날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퀘렌시아라는 표현이 있는데. 레푸기움과 일맥상통하는 듯. 퀘렌시아는 인간내면에 있는 성소.


& 내게 과거 레푸기움은 요가원이었다.

그날 내기분이 어떻든, 무슨일이 있었든 무조건 내하루를 풀어내는 곳.

들숨과 날숨을 쉬며 명치를 열고, 하루종일 굽었던 고관절과 어깨, 날개뼈를 펴내서 자글자글하게 주름잡힌 내영혼까지 폈던 곳.

지금은 그정도의 강력한 레푸기움은 없는 것 같다.

다만 그와같이 내몸의 피난처 의미로 생각해보면, 지금은 필라테스 학원이 그렇다.

일상에 정렬을 잃은 내몸의 정렬을 맞추는 곳이니. 몸의 정렬을 맞추다보면 마음의 무질서함도 정리가 된다.


그리고 집안에 레푸기움은 남편방이다.

육퇴를 하고나면 보통 저녁9시 정도인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그래서 남편방에 내몸을 뉘인다.

(안방에선 아기가 자고, 거실에선 소리를 낼수 없고, 작은방은 아이의 놀이방이라 뉘일 공간이 없다보니 어쩌다보니 우리 부부의 휴식처가 남편방이 됐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남편과 야식을 먹으며 수다를 떤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게 휴식의 레푸기움은 남편방.


04. 매장과 파종의 차이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돼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어둠속 빛이 한줄기도 보이지 않을 때.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저 밑바닥으로 뿌리내려 계절이 되었을 때 꽃피우고, 삶이 열릴 수 있도록.

매장이 아닌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현재의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 한때 내꿈이 매장됐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마도 성인이 된 후 첫 시련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당연히 갖고 있던 꿈이 실현되지 않자 악마에 영혼이라도 팔고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내가 쓴 일기에 그렇게 써있더라...

진심이었다. 그때의 내감정이 기억난다.

아마도 그때 악마가 나타나서 거래를 제안했다면, 난 수락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나는 인생의 테마를 바꾸기로, 그냥 그것만 쫓고 살기는 지긋지긋해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글쎄 그때는 그걸 ‘파종’으로 생각하진 않고 그냥 ‘순응’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

그러고나니 시간이 좀 지나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던 재능이나 적성 등이 완전히 매장된 건 아니다.

다른 형태로 다른 발아로 나타나긴 했고, 지금 브런치도 그 일환이다.

그렇게 보니 ‘파종’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나는 ‘워킹맘’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체감하지만,

반대로 ‘전업주부’의 삶이 얼마나 답답할지도 종종 생각하곤 한다.

돈이 많으면 내가 전업주부를 할까?

돈이 있든 없든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내가 감내할 수 있을까?

아이가 크고 내소득도 내경력도 없으면 우울증이 오는건 자연스런 수순이 아닌가?


아이를 키우는 동안 경력단절이 되는 여성이 많은 걸 보면 아마 그들도 그들의 사회적 자아가 매장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재취업이 녹록지 않은 현실을 보면 실제로 매장에 가깝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인스타그램, 유투브 등의 새로운 창구가 발달하면서 전업주부들의 아이템과 기술이 소통을 넘어 상품화 되는 경우도 꽤 늘어났다. 이들에겐 그들 자신의 재능이 ‘파종’ 됐던 셈.

결국엔 끝까지 자신을 포기 하지 않을 것, 그리고 계속해서 두드릴 것.

이 두 가지 마음과 자세가 매장과 파종을 가름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05. 누군가를 안다는 것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걸어 올라가보는 것.


& 지금은 길눈이 밝아졌는데, 과거의 나는 100미터만 걸어가도 네이버 맵이 알려주는 위치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으면 돌아봤다.

잘못 찾은 거 아냐? 나는 그때부터 나를 못 믿고, 네이버맵을 못믿고, 네이버맵에 위치를 설명해놓은 가게주인과 온갖 후기 글들을 불신했다.

딱 50미터만 더 가서 고개를 45도 돌리면 나오는데, 그사이를 못 믿고 돌아서려한다.


그러니 한 사람을 믿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언어와 비언어적 요소로 소통하는 사람 사이에 편견과 불신이 들어서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온갖 기회비용, 거래비용을 들여가며 서로를 알아가야한다.


저자가 말했듯 그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일.


그러니 우리가 서로 같은 나라 말인데 왜 이렇게 못 알아듣냐며 언성을 높이고, 도대체 이해할수 없는 족속이라며 답답해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지구상의 일.


06. 셴파

셴파, 티베트어로 '붙잡히는 것' '생각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

모기물린 곳과 같이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다 결국 고통이되는 것.

고통은 우리를 떠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지금 당신의 셴파는 무엇인가.

현상은 아무 힘이 없다.

사실에 내가 부여하는 셴파만큼의 무게가 더해져 내 마음에 자리 잡을 뿐이다.


& 나의 셴파가 무엇인지 나는 명확히 인지한다. 다만 입밖에 내기 쉽지 않고 더욱이 활자화 하는 건 더욱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언젠가 브런치에 나의 셴파에 대해 쓰는 날이 오지않을까.


킬레가 또 데켕게
(힌디어;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

07.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길이 막히는 것은 내면에서 그 길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거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축복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


끝으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감은 그저 매일 계속 쓰는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게 아니듯 글쓰기가 쉽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다.


& 나에게도 진실한 문장 딱 한줄이 남길 바란다.

맑은 콩나물국처럼 들여마셨을 때 속이 풀리는 딱 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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