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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멘 Mar 20. 2024

휴가의 맛

휴가 중독자의 삶


부르기만 해도 애타는 그 이름, 휴가.


모든 직장인이 매일 먹어도 안 질릴 맛이 바로 휴가의 맛이 아닐까.


나에게는 약 22일의 휴가가 있다.


정확히는 유급연차일수 22일.

그밖에 제도적 개선으로 부모휴가 5일과 가족 돌봄 휴가 2일이 추가로 생겼다.


결과적으로 1년 동안 유급으로 쓸 수 있는 휴가의 개수는 29일.


여름휴가 평균 5일을 제외하고 24일이 남고, 그럼 한 달에 약 2일 남짓 쓸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꼭 써야 하는 휴가가 몇 개일까?


어린이집 OT 1일.

어린이집 여름 및 겨울방학 5~7일.

어린이집 부모참여 행사 및 수업 등 1년에 평균 4회.


넉넉잡아 12일 정도는 어린이집 일정에 맞춰 쓰게 된다.

그중 여름방학 5일은 내 여름휴가와 맞추면 되니까

나머지 7일 정도를 꼭 빼놔야 한다.


24일 중 7일을 빼면 17일 정도 되겠다.

그럼 꽤 여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 그 상인 법.


아이는 1~2달에 한 번쯤은 어린이집을 못 갈 사정이 생겼고(예를 들어 감기가 너무 심하다든가, 유행병이 걸렸다든가, 열이 난다든가)그래서 5일 정도는 불가피하게 휴가를 쓰게 된다고 가정하면

12일 정도 남는다.


그런데 여기 생각지 못한 복병, 도우미선생님의 휴가가 또 있다.

보통 이게 내 일정과 맞으면 괜찮은데, 인간사 다 그럴 수 없기에 보통 또 1달에 1번 정도는 내가 등하원을 모두 케어해야 한다.

(현재 나는 4월부터 육아기 단축근무가 끝나고, 풀타임 노동자로 복귀한다)


결국 약 7일 정도가 내가 진짜 쓸 수 있는 자유 휴가로 남는다.  

이때 나는 못 갔던 미용실도 가고, 병원도 가고, 그밖에 개인사도 처리하고 정말로 놀 때도 있다.


정말로 '휴'가 일 경우는 남편과 휴가를 맞춘다.

혼자 먹고 노는 것도 가끔 필요하고, 남편과 먹고 노는 것도 필요하니까.


우리는 신혼도 짧았고(결혼 2개월 후 임신) 주말에도 평일에도 일과 육아를 둘이 병행해야 하므로

사실 둘이 밥 먹으러 나가는 것도 평일휴가를 맞춰야 가능하다.


얼마 전 친구네 집에 아이와 함께 놀러 갔다가,

친구 남편이


"우리 파묘 언제 봐?" 하고 묻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 눈치 좀 보고,  말씀드려 볼게" 하고 친구가 대답했다.


그때 생각이 들었다.

'아, 친정엄마가 있으니까 저런 대화가 가능하구나'


뭐 알고는 있었지만 저런 옵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내상황에 대해 재인지하게 됐달까.


아무튼 휴가의 맛은, 나에게 정말 예측불가능한 맛이다.

왠지, 언제, 갑자기 써야 할지 모르니 그냥 쓸 수 없는 오리무중의 맛.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휴가를 쓸까 하다가도,

그랬다가 무슨 일이 생겨서 당장에 또 휴가 쓰게 되면 어떡해? 하고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휴가가 부족하거나, 당장에 업무민폐가 생기면 안 되니까.

물론 전자의 경우는 해결책이 있긴 하다.

내년의 내가 휴가를 덜 쓰면 되니까

(우리 회사는 금년 유급휴가일자를 초과할 경우 다음 해 휴가일자에서 차감한다)


아무튼 유급휴가 잔여일수에 대한 금전적 보상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최소한 마이너스는 되지 말게 쓰자는 게 내 목표다.


작년은 딱 0일 남겼다.


올해 휴가의 맛은 어떨까.

작년처럼만 돼도 성공일 듯한데.

 

사실 낫지 않는 감기와 컨디션 난조로 오늘 휴가를 쓸까, 내일 쓸까,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지면서

이 글을 쓰게 됐다.


아, 휴가의 맛.


이놈의 맛.


쓰지 못할 때 그 독성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휴가중독자다.


언제나 쓰고 싶지만, 언제든 쓸 수 없는 휴가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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