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영감사전 25 - (22) 사람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온 나의 경력들이 지워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여기 열거해본다. 팟캐스트 ‘도심시’의 진행자가 됐는데, 팟캐스트 방송 링크를 경력증명서로 제출하고 싶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의 소풍 김밥을 싼 경력, 책방에서 만난 사람들과 찾은 강화도 갯벌에서 바닷물이 차오르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마음,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 골목길도 제출하고 싶다. 그리고 오리를 걱정하느라 경력증명서를 떼지 못한 경력까지도…."
1. 이소연 시인의 칼럼 중 일부를 다시 읽어봅니다. 새롭게 일하게 된 곳에서 경력증명서를 요구하는데, 정작 '공식적'이고 '문서화'된 경력증명서를 뗄 곳이 많지 않아 힘들고 수고로운 마음을 담담히 풀어내는 글입니다. 글을 읽고 나니, 일면식 없는 이소연 시인의 마음이 멀리 있는 제게도 전해집니다.
2.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한번씩 이력서를 정리할 일이 생깁니다. 이력서에 몇 줄 적어넣을 만한 업무 이력을 채우고, 그 이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각종 서류들과 자격증을 챙깁니다. 그러다보면 내 커리어와 내 인생을 이렇게 한두 장, 두어 장의 종이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동시에 듭니다.
3. '이력서를 잘 정리하는 법'도 분명 보고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직이 잦아진 시대이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이력서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커리어 경로가 원하는 바대로 가고 있는지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인이 말했듯, 해당 직종에 걸맞은 역량을 갖고 있다고 뽐내기 바쁜 이력서에 '아이의 소풍 김밥을 싼 경력'과 '강화도 갯벌에서 바닷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던 마음'이 들어갈 공간은 아마도 없겠죠. 대면 혹은 비대면 인터뷰를 통해서 그나마 자신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한된 시간 내에 한 사람의 면면을 온전히 살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4. 이소연 시인의 글을 읽다 불현듯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MBA 지원을 할 때, 처음 써야 하는 에세이 중에 '25 Random Things'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스물 다섯가지의 에피소드를 두 장 분량 이내로 써야 하는 에세이였어요.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였는데, 처음에는 너무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난해한 질문도 아니고, 그저 나 스스로에 대해서 쓰면 되었으니까요.
5. 하지만 몇 개 적어내려가다가, 이 에세이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스물 다섯 개라는 한정된 조건 안에서 그동안 나라는 사람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에 비하면 이력서에 들어가는 내용들은 되려 표현하기 쉬웠습니다. 적어도 어느 직장,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는 '경력증명서'가 증명해주니까요.
6.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스물 다섯 개의 지점'을 간결하게 설명해보라는 질문은 그동안 앞만 보며 달려왔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그 속에는 아마도 '아이의 소풍 김밥을 싸는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다', '강화도 갯벌에서 바닷물이 차오르는 것을 볼 때, 마음이 가장 풍요로워졌다', '방학천 오리들이 무사하길 바란다' 라는 문장이 들어갈 공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7. 많은 회사들이 간단한 이력서와 몇 차례의 인터뷰만으로 같이 일할 사람을 뽑습니다. 하지만 결국 기계를 뽑는 게 아니라 동료가 될 사람을 뽑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힘들어하는지를 미리 이해할 수 있다면 좀 더 좋은 팀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그런 차원에서 단순히 직무 관련 능력과 성과 창출 경험만을 묻는 이력서와 인터뷰 외에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질문'들을 채용 프로세스에 효과적으로 담는 방식을 고민해보는 것도 어떨까 합니다. (물론, 천편일률적인 '자소서 질문' 말고요!)
8. 어디가서 경력증명서를 떼올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경력이 팀으로서 일하는데 분명히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인재들을 잘 가려낼 수 있는 눈밝은 채용 담당자들이 점점 더 늘어날 수 있길 바랍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우영우에게 변함없이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참고한 콘텐츠
경력증명서에 넣을 수 없는 나의 경력들
(한국경제, 2022년 7월 8일)
* Photo by Christina @ wocintechchat.com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