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문제도 알고보면 내집마련과 같은 삶 속 문제다
한국 사회의 기본 구조와 지향점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변곡점을 거치며 구체화되었습니다. 이후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달라진 시대적 변화상은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최근까지 변화한 남북관계는 아직까지 우리 삶을 규정하는 법률에 온전히 반영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번 화와 다음 화에서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사회적 토대를 만들었고, 그후 지금까지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아빠, 난 왜 한국에서 태어났어?”
아이가 난데없이 묻습니다. 답을 해주기 꽤 궁색합니다. 지구상 수많은 나라들 중 아이가 한국을 스스로 택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요.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라, 살면서 내 나라에 대한 소속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해외여행이라도 가서 가끔 외국인들에게 자기소개라도 해야 할 때면, 상대방의 질문에 당황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North? South?”
당연히 ‘사우스’라고 손사래를 치며 쓴웃음을 짓지만, 그제야 평소에는 생각도 않던 또 다른 코리아, ‘북한’의 존재에 대해 떠올려보게 됩니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 떨어져 있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혼자서는 제대로 전신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북한은 과연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 계속 잊을만 하면 내 삶에 크든 작든 계속 불쑥 튀어나와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북한이라는 존재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크고, 진합니다.
북한이 한국 사회를 형성하는 데 미친 영향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선 헌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이라고 누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어요? 여러가지 기상천외한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은 “민주공화국이다.”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은 다름아닌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문장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기본 정체성을 규정한 문장이기도 합니다. 현행 헌법 제1조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같은 해 4월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임시헌장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대한민국 헌법이 생각보다 긴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헌법을 좀 더 볼까요? 대한민국 헌법 제 3조는 영토에 관한 조항이에요. 그런데 이 영토조항에서 북한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합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북한은 한반도의 북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행 헌법상으로 보면 북한은 대한민국인 거죠.
법은 굉장히 체계화된 코드입니다. 모든 법률의 상위에 있는 헌법도 당연히 마구잡이로, 내키는대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헌법 조문의 순서가 곧바로 각 조문간의 효력상 우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헌법은 국가가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을 논리적으로 보여주는 문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헌법 맨 첫머리에 위치하는 전문 및 총강(제1조~9조)은 중요하죠. 마찬가지로, 헌법상 국가 정체성을 설명하는 1조와 2조에 이어 영토를 이야기하는 3조가 등장하는 것 또한 적지 않은 의미를 갖습니다.
한국인들은 35년간의 식민지 세월을 거쳐 해방을 맞았고, 꿈에 그리던 국민국가를 만들었습니다. 1948년 제헌의회 의원들은 국민들을 대표하여 첫 헌법, 즉 제헌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제헌 헌법은 임시정부에서 기초한 임시 헌법을 토대로 이 나라가 과거와 같은 왕정이 아닌 공화정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밝힙니다. 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첫머리, 제1조와 2조에서 이 나라가 국민이 공동으로 주권을 갖는 '공화국'임을 천명하죠. 그리고 바로 그 다음으로 공화국의 주권이 미치는 공간인 ‘영토’인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언급합니다. 따라서 헌법 제 3조 상으로 보면, 북한은 법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존재'가 됩니다.
헌법 제 3조는 사실 연원을 따지면 앞의 제 1조, 2조와 같이 1919년 9월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임시헌법의 제 3조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한다’거든요. 따져보면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든 원칙이, 현재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조항을 보고 ‘아 그렇구나! 북한도 같은 대한민국이니 그럼 여권 없이 오늘 차타고 개성 가서 점심 먹고 평양 가서 저녁 먹어야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법에는 분명히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쓰여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1919년에 만든 법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규율하는 기본 원칙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법은 변화하는 사회상을 반영해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야 적절한 법적 판단이 가능하니까요. 과거에 비해 인권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인권에 관한 법이 새로 생겨나고, 과거에는 없었던 가상화폐라는 새로운 경제현상이 일어나니 관련법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사회 현상을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다소 시간차가 생길 수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북한에 관해서는 법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너무 긴 시간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자, 그럼 헌법의 다음 조항을 계속 볼까요?
헌법 제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제3조와 어딘가 앞뒤가 안맞는다고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제 3조까지는 한반도 상에서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제 4조에서 느닷없이 '통일' 이야기가 튀어나옵니다.
결혼을 혼자서 할 수 없듯, 통일도 상대방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제 4조는 이미 잠정적인 통일 대상으로서 상대인 북한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조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 3조와 제 4조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헌법 제 4조는 앞의 제 1~3조와 같이 1919년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조항이 아닙니다. 헌법 제 4조가 추가된 것은 제헌헌법이 제정된 후 약 40여 년 후인 1987년 헌법 개정 시점입니다. 일제강점기가 만 35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이었으니, 그만큼 이상의 시간이 더 흐른 뒤 그동안의 시대변화를 반영하여 새로이 포함된 조항인 것입니다.
헌법 제 4조를 통해 ‘통일을 지향함’을 국가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기까지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이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려면 1948년부터 1987년까지 39년간 계속됐던 경쟁적 남북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8년에 남한과 북한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남북분단이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미-소가 각각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까지 국가 성립의 기본 전제는 ‘단일국가’ 였습니다. 물론 해방 이전에도 좌우 이념대립이 있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1948년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뒤이어 전쟁이 일어나면서 분단이 고착화됩니다. 같은 해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한 남한과 북한은 내부적으로는 ‘통일’, 외부적으로는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인정’이라는 목표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됩니다.
즉, 주권국가 수립 이후 초기 40년간 한국 사회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각종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한국은 끊임없이 쌍둥이와도 같은 북한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던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려야 했으니까요.
1948년부터 1987년까지 남북 체제 경쟁 시기에 형성되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제도들을 조금 살펴볼까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실생활에 지금껏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토지개혁’과 ‘의료보험’ 정도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토지개혁부터 살펴볼게요.
먼저 1950년대 전후 진행되었던 토지개혁입니다. 요즘에도 직장인들이 만나면 늘 주된 화두가 되는 것은 부동산과 주식이죠. 부동산은 다시 말하면 토지이기도 합니다. 보통 부동산 하면 아파트를 떠올리지만, 아파트 역시 건물과 토지(대지지분)로 나뉘니까요. 그런데 산업화 이전 시기의 토지는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었습니다. 토지는 다름아닌 농지, 땅에서 쌀을 비롯한 각종 작물이 자라는 공간이니까요. 해방 전후 1940년대에도 그 농지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 지주들이 한반도의 농지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었는데, 독립 이후 이 땅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중요한 사회 문제로 떠오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거창해 보이는 남북문제도 사실 한꺼풀 더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내집마련'과 같은 일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에 민감합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주된 수단을 내가 소유할지, 남에게 빌려 쓸지의 문제는 개인과 가족의 삶에 굉장히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요. 요즘 사람들에는 '내집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면, 당시엔 '내땅마련'이 가능하냐 아니냐가 중요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심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 당시의 땅은 삶의 터전인 동시에 생계수단이었습니다. 내집마련과 취업문제가 함께 겹쳐진 상황이었다고 할까요.
이 상황에서 남북은 다소 다른 의사결정을 합니다. 북한은 1946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기치로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나눠줘 버립니다. (지금으로 치면 다주택자들의 집을 빼앗아 세입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줘버린 격입니다.) 북한의 선제적 행동에 남한 정치권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땅을 공짜로 받았다는데 우리는?’이라는 생각을 남한 사람들도 자연히 했을 테니까요.
이에 따라 남한 역시 1949년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킵니다. 단 북한과는 다른 ‘유상매입 유상분배’ 형태였어요. 전쟁 직전인 1950년 4월부터 토지가 분배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거의 모든 남한 농부들이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신분이 바뀝니다. 당시 정부는 가구당 약 9천 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할 수 없게 하고, 그 이상의 농지는 연평균 소득의 150% 선에서 매수하고, 매수한 농지를 농부들에게 분배했습니다. 농부들은 배분받은 농지에서 나오는 수확의 30%를 5년간 꾸준히 현물로 갚고 나면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년 만기 대출 갚고 나면 세입자에서 유주택자로 바뀌는 거죠.)
이러한 토지개혁은 한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요? 무엇보다 농업이 산업의 전부나 다름없던 시기에 전국민이 자산(=땅)을 갖게 되었다는 점은 전례없는 큰 변화였습니다. 지주와 같은 일부 부유층만이 아니라, 소득의 50%를 농지를 빌리기 위한 수수료로 내야 했던 소작농들이 비로소 자산을 증식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소득구조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자산증식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한 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소 팔아서 자식 대학 보냈다는 산업화 시기의 수많은 '개천용' 일화들도 사실 이러한 토지개혁을 통한 자산재분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다음 화에선 1948년부터 1987년 사이 남북 체제 경쟁 시기에 만들어진 또 다른 제도, 의료보험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그 외에도 남북한 관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을 살펴보고, 2024년 지금과는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이야기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