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민 Apr 21. 2024

우리 삶을 바꿔 놓은 두 번의 순간

지난 100년의 과거사 돌이켜보기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도 어른이 되면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자라나는 과정에서 개개인이 겪는 경험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런 경험들이 누적되어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죠. 국가도 어떤 면에서는 개인의 삶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이번 회에는 짧게는 지난 70년, 길게는 100년간의 과거사를 가볍게나마 돌이켜 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북한이 한국 사회와는 어떻게 다른 역사적 기억을 가져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다음 100년을 위한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말이죠.  

이번 글와 다음 글은 한반도를 둘러싼 근현대사에 관심있는 분들이 읽으면 좋습니다. 먼저 북한과 한국 사회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배경을 경로의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알아보고, 다음으로 간략하게 북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건을 살펴봅니다.


경로의존성     


남과 북이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의 밑바탕에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남과 북은 같은 뿌리다’, ‘하나였던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이며, 둘인 상태는 비정상적 상태다’ 등이죠. 단군부터 조선까지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문화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같은 점이 다른 점보다 많다는 것, 우리는 원래 ‘하나’였다는 것은 둘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라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인가?’ 싶기도 하죠.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쌍둥이 형제도 자라서는 각자 자연스레 다른 길을 걷습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경험을 합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은 어쩌면 독립된 자아를 가진 존재라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주의 역사, 지구의 역사와 같은 긴 시간 주기와 비교해 본다면 민족도, 국가도 결국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상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제시한 사회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책 Imagined Communities (1983)


기록이 존재하는 지난 수천 년을 돌아봐도, 과거에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던 나라들이 각자의 사정에 따라 별개의 국가를 구성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꼭 단일 민족이 단일 국가를 구성해야만 한다는 원칙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영어를 쓰지만 다른 정치 지향을 가지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 같은 사례도 있고, 네덜란드-벨기에, 아일랜드-북아일랜드, 인도-방글라데시처럼 한때 같은 나라였으나 종교 문제로 다른 길을 가는 국가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여러 민족이 모여 단일 국가를 이루는 다민족 국가들도 많습니다.      


사회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경로의존성(Path-dependenc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볼까요? 용어가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삶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익숙한 개념입니다.     


사람은 과거에 생각한 대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기존에 쌓아 온 경험과 의사결정 습관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인문학 전공을 선택한 사람이 대학 졸업 후 뇌과학자의 길을 가기는 쉽지 않죠. 건설사에 취업한 사람이 갑자기 기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고요. 경로의존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비용으로 전환되는 선택을 하는 건 적잖은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현재 기술적으로는 모바일 결제가 가능해도, 여전히 신용카드를 많이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타자기 시절 이래 줄곧 쓰고 있는 QWERTY 키보드도 대표적인 경로의존 사례입니다. (사진: Unsplash의 William Warby)


남과 북은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경로를 걷게 되었던 것일까요? 갈라진 길은 계속 벌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시 한 길로 뭉쳐지는 것일까요?     


갈림길의 시작 (1919-1948) - 러시아 혁명과 민족자결주의     


남북의 운명이 갈린 명목상의 순간은 1948년입니다. 해방 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과 북에 진주한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 한국과 조선은 각기 단독 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3년간의 전쟁을 겪으며 본격적으로 체제 경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1948년의 결정이 아무런 배경없이 일어난 사건은 아닙니다. 수천만 명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인만큼, 즉흥적으로 결정이 이뤄지진 않았겠죠. 그런 이유에서 1948년 이전, 즉 분단 이전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35년간 일어났던 중요한 국제적 사건을 두 가지 꼽으라면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과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을 들 수 있습니다. 1차 대전의 경우 사건의 주된 배경은 유럽이었지만, 이로 인한 여파가 전 세계에 미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해야 할 사건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입니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의 주도로 일어난 이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전제군주정이 사라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됩니다. 그동안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했던 급진적 개념의 정치 체제가 현실 세계에 출현한 것입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147회 '러시아 혁명' 편 (2024년 4월 16일 방영)


1910년대는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강제로 식민지 삼아 통치하던 제국주의의 시대였습니다. 식민지 상태에 놓여있던 국가들에게 러시아 혁명이 얼마나 강한 임팩트를 주었을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100년 후 IT/금융업계에 불어닥친 블록체인, 비트코인 열풍 이상이지 않았을까요?).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목표는 있었으나 힘의 차이로 인해 무력감을 느끼던 당시 약소국 국민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해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1920년대에는 많은 나라에 러시아와 비슷한 노선을 취하는 세력, 즉 공산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테크업계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앞다퉈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죠.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은 물론, 중국(1921년), 일본(1922년), 몽골(1924년) 등에서도 공산당 결성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1925년이 되어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결성됩니다.      


러시아 혁명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영향력을 미친 것은 민족자결주의였습니다. 1차 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후처리를 위해 이야기한 원칙 중 하나입니다. 이는 당시 교전중이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등 각 제국에 속해있던 민족들이 스스로 국가를 수립하고, 자결권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고 뒤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은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한 기대감이 커졌던 결과였습니다. 실제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유럽에서는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과 아일랜드, 비유럽권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집트 등이 독립을 쟁취합니다. 비록 당시 패전국 식민지 위주로 적용되었기에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독립 시기를 2차대전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약하자면, 100년 전 이맘 때, 즉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은 ‘지배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당면 목표 달성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이자, 당시의 시대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적 노선으로서의 ‘공산주의’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빠르게 세를 넓히던 시기였습니다.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 국민들로서는 미국 대통령이 언급한 ‘민족자결주의’조차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대부분 적용되지 않는 냉혹한 힘의 논리를 인식하게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100년 전 선조들 역시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우익과 좌익으로 말이죠. 우익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자가 백범 김구라면, 영화 ‘암살’(2015)에서 조승우 배우가 연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김원봉은 대표적인 좌익 민족주의자입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전후부터 시작되었던 이러한 좌우 노선 갈등은 1945년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시기까지도 계속 이어집니다. 30년간의 갈등이라면 나름 뿌리깊은 갈등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1948년 남북 단독정부 수립이 1919년부터 이어진 독립 방법론, 그리고 이후 어떤 국가를 설립할 것인지에 대한 이상의 차이로 인해 빚어진 갈등의 결과였다면, 그 이후는 어땠을까요?     


1948년 이후로는 같은 시기에 출범한 두개의 정부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경쟁하는 구도가 이어집니다. 길게 보면 1919년 이후부터 계속돼 온 갈등이 훨씬 명시적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서로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정부를 세웠으니, 내 방식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보여줘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새로운 갈림길의 서막(1948-1992) - 페레스트로이카와 탈냉전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러한 남북 간의 경쟁이 전 세계 흐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민족자결주의와 연결되어 있듯, 20세기 후반의 남북 체제 경쟁 역시 제2차 대전 이후 생겨난 냉전, 그리고 1980~1990년대에 진행된 탈냉전이라는 변수와 연결되어 흘러갑니다.     


잠깐,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이야기를 해볼까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21세기를 앞두고 사라진 그 나라 말입니다(‘러시아’보다 ‘소련’이라는 말이 익숙하면 세대를 알 수 있죠).      


지난 2022년 8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반세기동안 이어져 온 미소 냉전 종식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입니다. 고르바초프는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재임중이던 시기, 미소 군축 경쟁에 합의하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시도함으로써 냉전 종식의 초석을 놓습니다.  


1985년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악수하는 장면 (Dennis Paquin/Reuters)


그렇다면 미국과 필적할 만한 강대국이었던, 세계 최초로 사람이 탑승한 우주선을 쏘아올리기도 했던 소련은 왜 1980년대 말 군비를 줄이고 개혁개방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역사는 100%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기 때문에, 자연과학처럼 동일한 상황이 재현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건의 인과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양한 변수가 동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잘나가던 스타트업들이 한순간 망해버리는 이유를 찾으라고 하면 수백 개도 더 찾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학자들은 사건에 영향을 미쳤을 법한 수많은 변수들을 찾아내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가 오래도록 쌓이면서 학계의 교차 검증을 통해 학설로서 정착됩니다.    

  

소련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분석이 있으나, 대체로 ‘소련의 경제력이 미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적습니다. 카지노에서 플레이어가 하우스를 이길 수 없듯, 치킨게임에서 소련이 미국의 자본력을 당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소련 수립 이후 1940~195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의 경제 성장은 미국도 경계할 만큼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공산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누적되면서 1980년대가 되면 미국을 쉽사리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는 분석입니다 (공산주의/계획경제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화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냉전기 소련은 미소 경쟁의 한 축이자, 공산권의 정치/경제를 뒷받침하는 맏형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중국과도, 북한과도 나름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라는 상징성이 적지 않았습니다(원조 맛집 같은 느낌이었을까요). 그런데 그러한 소련이 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성장동력이 떨어지고, 결국 개혁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북한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 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속되어 온 남북 체제 경쟁의 종지부를 찍는 중요한 사건과 남북 간의 대립 구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이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전 04화 가만히 앉아 나도 모르게 내고 있는 돈, 분단비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