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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ul 29. 2024

석유가 낳은 고난의 행군

탈냉전이 북한에 불러 일으킨 나비효과 


이전 화에서는 소련이 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성장 동력이 떨어지고, 결국 개혁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상황을 알아 봤습니다. 이 시기 북한에 분수령이 되는 영향을 끼친 국가가 또 한 곳 있습니다. 바로 중국입니다. 이번 화는 중국 이야기로 시작해 볼게요. 

고르바초프가 세상을 뜬 2022년 8월은 공교롭게도 한중 수교 30주년이었습니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것이 1992년입니다. 1992년 이전에 한국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중국’이 아니라 ‘중공’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 책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대만을 지칭하는 ‘자유중국’이라는 용어도 있었죠. 그때까지 중국은 중국이 아닌 중공, 즉 중국 공산당과 동의어인 적성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국과 대한민국이 어느 순간 수교를 합니다. 이 사건은 북한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요?  


탈냉전으로 고립된 북한     


임시정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민국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때부터 대만 국민당 정부와 동지적 관계를 맺어왔던 사이입니다 (지금도 명동 중국대사관 앞 모 카페는 과거 대만 국민당이 쓰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레트로 감성을 내는데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만과의 단교라는 비용까지 치러가면서 중국과 수교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수 정부였던 노태우 정권 시기(1987-1992)는 탈냉전의 한가운데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이 시기 한국 외교에서 가장 큰 변화는 북방 정책을 통한 러/중과의 수교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1990년 러시아, 뒤이어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마무리하면서 공산권의 양대축이자 인접국인 두 강국과 상대를 상대로서 인정하는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됩니다.     


당시 북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대체 역사물처럼 상황을 반대로 바꿔 생각해보면 북한이 가졌을 위기감을 조금 더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습니다. 1990년 전후로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몇 배 앞서고, 올림픽을 개최하며, 뒤이어 미국 및 일본과 수교에 성공했다면 하는 상상 말이지요. 아마도 남한의 압박감과 고립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1990년과 1992년에 잇달아 이어진 러시아와 중국의 한국 수교는 한국전쟁 이후 40년간 지속되었던 한미일-북중러 간의 대립 구도가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한국과는 반대로 여전히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하지 못한 북한은 외교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는 경제적으로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난의 행군’, 새로운 갈림길의 시작…?     


1990년대는 북한에 최대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이 시기가 찾아왔던 데는 탈냉전과 이로 인한 국제적 진영 구도의 변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냉전기 공산권의 경제 시스템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소련은 공산주의를 기치로 내건 제2세계의 종주국으로서, 동유럽과 북한을 비롯한 각국에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국도 인접국이자, 중국 성립시기와 한국전쟁기를 거치며 혈맹의 위치에 있었던 북한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소련과 중국이 공산주의 우방에 제공했던 핵심적인 물자 중에는 ‘석유’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오일 쇼크가 전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준 것은, ‘석유’가 현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자국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서유럽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무기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주요 에너지원인 석유가 없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일단 교통과 물류가 모두 마비되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난방도 문제가 됩니다. 공장도 돌아가지 않겠죠. 뿐만 아니라 군대의 핵심 장비들인 탱크와 장갑차, 전투기도 석유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소련은 중동과 함께 세계에서 손꼽히는 원유 생산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 에너지 생산을 위한 핵심 자원인 석유를 공산권 국가들에게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제공하고, 이에 대한 대가를 구상무역(barter trade, 물물교환) 형태로 받곤 했습니다. 이럴 경우 대외무역상 외화 결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이점이 생깁니다. 사실상 소련이 상대국에 경제적 편의를 봐준 셈입니다(물론, 소련이 일방적으로 북한에 편의만 봐준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접국 관계가 그러하듯 북한-소련 관계 역시 생각보다 복잡미묘한 역사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980년대 통계를 보면 북한은 원유 수입을 위해 러시아(약 100만 톤)-이란(약 90만 톤)-중국(약 50만 톤) 등과 교역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이 구도가 극적으로 바뀝니다.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에너지 수급에 차질이 빚어집니다. 소련이 해체된 1991년의 경우 과거 연간 100만 톤에 이르렀던 러시아로부터의 원유 수입이 한자리 수로 줄어듭니다. 당시 외화가 부족했던 소련이 북한에 경화 결제, 즉 외화로 대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당시 북한은 외화로 원유 수입대금을 지급할 능력이 없었기에 수입이 끊깁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으로부터의 원유수입 역시 1999년이 되면 약 30만 톤까지 줄어듭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경제의 동력이자 혈액과 같은 원유가 1987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시기 약 10분의 1까지 줄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죠(이러한 원유 수입 규모는 현재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통계 기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현재 북한이 공급받는 석유는 약 중국이 제공하는 약 50만 톤의 원유 그리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밀수 형태로 들여오는 원유와 정제유 정도입니다).     


고난의 행군’은 이 시기 북한이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1995년을 전후하여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사회주의 시스템상 식료품을 지급하는 방식은 ‘국가에 의한 배급’에 의해 이뤄집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국가가 직접 쿠팡이나 마켓컬리 역할을 하는 것이죠. 코로나가 엄중하던 시기, 확진자들에게 지자체에서 국가 부담으로 음식과 생필품을 배달해줬던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물론 새벽배송 이런 수준을 떠올리면 안되고, 기본적인 원리가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든 자주 익히지 않으면 인간의 능력이란 금세 감퇴하기 마련입니다. 배급제도에 수십 년간 익숙해진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 배급량이 줄어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고통이었습니다. 당시까지의 북한에는 물품을 거래하기 위한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도 희박한 상태였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구조상 물건을 거래하기 위한 ‘시장’이 존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당장 생계 유지에 문제가 생긴 주민들의 필요에 의해 ‘장마당’이라는 형태의 소규모 시장이 비로소 음성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국가의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이 반세기만에 멈춰섰고, 주민들이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 시장에 나가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이때 시작됩니다.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아예 북한을 탈출하고자 시도하는 탈북민 규모 역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대폭 늘어납니다.     

‘다름’을 이해하는 것     


100여년 가까이 이어지는 남북관계 속에서 언제가 남북의 운명을 가른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1956년에 일어났던 북한의 정적 숙청(8월 종파사건), 또는 1974년 오일 쇼크에 이은 북한의 채무불이행 시작, 1993년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 탈퇴 및 2006년 첫 핵실험 실시 등을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역사적 의미가 큰,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 역사에서 북한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시점을 골라보라면, 저는 1919년과 1992년을 선택하고 싶어요. 물론 그 사이에도 중요한 사건이 많았지만, 남북한의 운명이 세계사와 별개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함께 움직였다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시점들이기 때문입니다. 1919년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92년은 1991년 소련 해체와 맞닿아있습니다. 어쩌면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냉전 종식 이후 이어진 다음 30년의 세계를, 남북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공산주의라는 인류사적 실험이 일단락된 후, 러시아와 동유럽은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동시에 전환하고자 했고, 중국과 베트남은 그리고 정치제제는 유지하되 시장경제를 분리해 받아들임으로써 1992년 이후의 미래를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국가와는 달리 북한은 드라마틱한 체제변화 없이 30년 넘게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형태로 현실세계에 존속하고 있습니다. 북한식 ‘제3의 길’이라고 해야 할까요? ‘주체사상’과 ‘자력갱생’을 주장하고, ‘핵무기’를 품은 채 말이죠.     


북한이 걸어온 길은 같은 시기 남한이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입니다. 그 길을 다시금 되짚어보는 것은, 남한과는 다른 형태로 북한이 그간 걸어온 ‘경로’를 살펴봄으로써 북한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입니다. 북한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금의 북한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차이’에 주목하는 작업입니다. 언뜻 남한과 별 차이 없어보이는 북한이 남한과는 어떻게 다른 길을 걸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다름이 생겨난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심어린 대화는 시작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다음 화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 체제에 대해 조금 더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물론 상당한(?)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북한 역시 기본적인 틀은 사회주의 체제이니까요. 북한의 정치 체제가 한국과 미국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주의 국가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이해할 수 있다면, 북한이 조금은 덜 이상해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사진: UnsplashZbynek Bur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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