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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Sep 22. 2024

북한의 금융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은행 없는 세상 이야기 

몇 해 전, 국가에 준하는 신용도를 가진 강원도가 빚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국내 채권시장 신용도가 동반 폭락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과거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이른바 블랙 스완과 같은 사건이자,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금융 시장의 본질이 결국 ‘신뢰’에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죠.    

이번에는 북한이 일찍이 경험했고, 북한 사람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금융 문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가 일찍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 세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은행 없는 세상이 있다?     


요즘은 길가에서 은행 점포 찾기가 어렵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온라인 뱅킹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에서 사라진다고 은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토스뱅크처럼 오프라인 점포 없이도 은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은행들이 새롭게 시장에 뛰어들어 기존 은행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죠.  

   

금융업계는 경제를 움직이는 혈액이라 할 수 있는 ‘돈’을 상품으로 하고 있는만큼, 상대적으로 많은 규제를 받으며 천천히 변화합니다. 하지만, 금융업계 역시 지속적으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갖고 경쟁합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죠.   

  

하지만, 혹시 이런 ‘은행’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적어도 저는 북한의 경제 구조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은행이란 아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우리 옆에 존재하는 제도이자 공간이었으니까요. 초등학생 시절 어린이 통장을 만들어 꼬박꼬박 저축을 해본 경험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나이가 있는 분들이라면 더운 여름 피서를 위해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은행을 일부러 찾아가 앉아있곤 하던 기억도 갖고 있을 거에요. 그런데 그런 은행이 아예 없는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     


한국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가에서는 은행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국가의 전반적인 통화정책을 관장하며 화폐를 발권하는 중앙은행이 있고, 이와는 별도로 가계와 기업을 대상으로 예금/대출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업은행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 별도의 목적을 가지고 국가가 설립하여 운영하는 국책은행들도 있지만, 이들 은행도 가계와 기업을 대상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상업은행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다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지폐와 동전을 사용하지만, 한국은행에 예금을 맡기거나 한국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 하에서 운영되는 북한은 원칙적으로 상업은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국가가 재정정책을 통해 경제를 운용하기 때문에 금융업의 필요성이 낮은 것이죠. 따라서 북한에서는 한국은행과 같이 발권력을 가진 ‘조선중앙은행’이 여/수신, 그러니까 예금과 대출 등 상업은행이 수행하는 업무를 동시에 담당해왔습니다.    

 

이렇게 중앙은행 중심으로 운영되는 제도를 단일은행제도(mono-banking system)이라고 부릅니다.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인 인민은행 중심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1979년 이후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며 농업은행, 중국은행, 건설은행, 공상은행 등 상업은행을 신설하게 됩니다. 

    

오랜기간 중앙은행 중심으로 은행제도를 운영해 온 북한에 상업은행이 생겨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계획경제를 축소하고 시장경제를 확대하고자 하는 김정은 집권기 들어 북한은 과거와 달리 서서히 상업은행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부터는 한국에서 이용하는 현금카드와 유사한 형태의 전자결제카드도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 참고 - 김민정(2021), “최근 북한 금융제도에 대한 이해”, 한국은행.   


북한의 전자결제 시스템에 관한 뉴스 (MBN News, 2023.12)

  

북한 사람들은 달러를 쓴다     


문제는, 북한 주민들은 은행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다는 점입니다. 즉, 상업은행이 생겼어도 은행에 돈을 잘 맡기지 않는다는 점이죠.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까요?    

 

북한은 과거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많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물자 유통에 이런저런 제약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경우 물가가 쉽게 변동합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북한 정권은 여러 차례 화폐개혁을 통해 시중에 풀려 있는 현금 규모를 조절하고 계획경제 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즉, 개인들이 집에 보관하고 있는 현금을 밖으로 끌어내서 경제 운용에 필요한 자금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론상 아무리 중앙은행에서 화폐를 찍어내도 국민들이 돈을 집에만 보관하면 화폐가 순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상태를 무시하고 계속 화폐를 찍어내게 되면 전체 화폐 유동성이 증가하고 화폐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합니다. 화폐개혁은 원론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통화정책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북한 정권에 의한 무리한 화폐개혁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2009년 제5차 화폐개혁은 시장경제가 북한에 어느정도 퍼져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신권을 발행하고 구권과 교환 가능한 금액의 한도를 정해버림으로써, 은행에 맡기지 않고 집에 보유하고 있던 구권이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러한 2009년 화폐개혁은 장마당이 확대되는 환경 속에서 돈을 벌었던 부유층에 대한 북한 정부 차원의 징벌적 조치였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2009년 화폐개혁이 북한 경제에 미친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북한 원화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고, 화폐 가치도 폭락했습니다. 따라서 이후 북한에서는 자국 화폐가 아닌 달러, 위안, 엔화와 같은 외화를 사용하여 거래하는 행태가 증가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북한에 인접한 중국의 위안화 유통이 증가함으로써 북한 경제가 중국 경제에 더 밀접한 영향을 받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북한의 달러화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프로그램 (MBC 통일전망대, 2021) 

 

북한에서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내건 전자 결제카드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달러라이제이션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국가 내에 외화가 주된 거래 수단으로 계속 활용된다면 정부로서는 경제 운용의 주된 도구 중 하나인 화폐 발권을 통한 통화 정책 기능을 잃게 됩니다. 경제가 침체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아무리 돈을 찍어내봤자 시중에서는 해당 돈으로 거래를 하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북한 정부로서는 사람들이 다시 은행에 돈을 예치하도록 금리를 인상하고, 적어도 외화를 덜 사용하도록 전자 결제카드 등 거래 편의성을 높인 제도들을 도입하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갖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북한 정부의 당근책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화폐개혁 이후 외화통용 현상은 오히려 더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이탈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화폐개혁 이전에도 40% 수준에 그쳤던 북한 주민들의 보유 원화 자산 비중이 화폐개혁 이후에는 20% 내외까지 떨어졌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즉, 보유한 자산의 70-80%는 달러 또는 위안화와 같은 외화라는 해석입니다. 보유 자산의 대부분이 외화라면 당연히 거래할 때도 외화를 통한 거래를 선호할 것이며, 당연히 원화로 환전 후 은행에 예치하려는 동기는 높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북한의 금융 시스템과 화폐개혁의 실패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21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 금융 시장에서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금융 시장이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별 탈없이 잘 작동할 것이라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용등급이 국내에서 가장 높은 AAA급인 한국전력의 회사채도 채 매각되지 못하던 2022년의 상황은 국내 채권시장이 그야말로 처음 겪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금융은 ‘신용’, 즉 믿음으로 굴러가는 시장이며 그러한 믿음이 한 번 깨지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경제에는 적지 않은 후유증으로 남으며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북한의 경험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다음 화에서는 북한의 과학 기술과 정보 통신 기술(ICT) 현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해킹 사건이 일어나면 ‘북한의 소행인가?’ 라고 언론에 보도되는 일도 이제는 드라마 속 클리셰처럼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현상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관점을 바탕으로 북한의 과학 기술과 ICT를 바라봐야 할지 알아보겠습니다. 


사진: UnsplashLive Ri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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