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면서도 다른, 경영을 보는 관점
이번 화와 다음 화는 경영경제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보려 합니다. 북한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과거사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기업 운영과 의사결정에 대해서도 적잖은 시사점을 제공해줍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창으로서 북한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현대 기업을 이해하는 데도 북한은 의외로, 하지만 꽤나 유용한 틀이 될 수 있습니다.
'계획은 계획에 불과할 뿐' - ‘국가계획위원회’
우리는 모두 살면서 일정 정도 계획(Plan)을 세우면서 삽니다. 물론 성격에 따라 좀더 즉흥적인 삶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통은 말이죠.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말이 되면 그 이듬해 경영계획(혹은 경영기획)을 세웁니다. 각 사업부는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기에 앞서 사업계획을 세우죠. 계획이 미치는 영향이 크면 클수록 참여하는 인원은 늘어나고, 계획은 더욱 세밀해지고, 구체화되며, 정교해집니다. 갑자기 혼자 훌쩍 떠나는 여행을 위한 계획과 수천 억 혹은 조 단위의 숫자가 오가는 기업의 경영 계획이 엇비슷한 시간과 노력으로 수립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계획이라는 것은 참 요상한 존재입니다. 실행에 돌입하면, 항상 처음 세웠던 계획과는 다르게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설사 ‘모두 다 계획이 있더라도’ 말이지요(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현실은 ‘기생충’보다는 ‘수리남’을 좀더 닮았습니다).
계획과 실제가 다른 이유는, 실제 환경에서는 계획을 세울 때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반드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의사결정자들은 불확실한 변수를 완벽히 통제함으로써 자신이 계획한 그대로 판이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자연과학에서도 실험실 밖을 벗어나면 변수를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일쑤입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합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복잡계’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상황을 가능한 한 최대한 통제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채 원하는 것을 이뤄내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획을 세웁니다. 그나마 최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위해 다양한 통계적 방법을 동원하고, 모델링을 시도합니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과학적 시도’, 그리고 ‘계획’을 통해 현실 세계에서 이념적으로 완벽한 이상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대표적 사회실험이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에 이은 소련 성립부터 시작된 이 실험은 비록 중간에 여러 왜곡과 굴절이 있긴 했지만, 지금도 중국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각자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도했던 실험이 이념을 넘어 자본주의 국가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케이스도 있습니다. 중고교 사회 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산물입니다. 생각해보면 자유시장 경제를 중시하는 자유주의 사상과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 계획은 서로 상치되는 부분이 많지만, 치열한 이념 경쟁 속에서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은 취사선택, 발전시킨 것이지요.
편의상 앞으로는 현대 북한과 같이 변형된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구분하기 위해 초기 소련과 중국, 1960년대 이전의 북한과 같은 형태의 국가들을 ‘전통적 사회주의’ 국가들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이들 전통적 사회주의 국가들의 정부 조직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정부 내에 존재하는 강력한 계획 조직입니다. 나라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번역하면 ‘국가계획위원회’ 정도로 통칭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획재정부 정도가 유사한 성격을 갖는 부처이지만, 하는 일은 2020년대 기획재정부의 업무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계획위원회가 하는 일은 단순히 경제를 전망하고 예산 및 지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넘어, ‘인공적인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전체의 경제 메커니즘을 계획하다
국가계획위원회는 얼마만큼의 물자가 있어야 국가를 유지하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지 세밀하게 계산하고, 그에 맞게 계획을 짭니다. 그리고 그 계획에 의거하여 하부 단위의 계획을 작성합니다. 국민경제에서 3대 주체라고 하는 가계, 기업, 정부의 모든 계획을 당의 특정 조직에서 설계하는 것입니다. 개별 기업단위, 개별 가구단위까지 말이죠.
이게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의 국가계획위원회가 아무리 뛰어난 엘리트들이 속한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집의 숫가락 갯수까지 파악하기는 어렵죠.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의지였습니다. 엘리트들이 모여서 효율적으로 계획을 짜면, 사회 전체적으로 낭비를 줄이고, 성장을 위한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흔히 잊기 쉽지만, 사회주의 국가에도 기업은 당연히 존재합니다. 다만, 민간이 소유하는 기업이 없을 뿐입니다. 당이 정부를 통해 모든 기업을 소유하므로, 전통적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기업은 100% 국영기업입니다. 이 기업들에 노동자들이 소속되고, 완전 고용 체제를 유지합니다.
그럼 사회주의 국가의 국영기업들은 어떻게 일을 할까요?
일하는 방식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가 주인이므로, 국가계획위원회에서 하달한 목표만큼 할당량을 받아 일을 하게 되죠. 일반적인 기업에서 수립하는 경영기획 내 핵심지표(KPI)가 이미 설정되어 있는 셈입니다. 목표를 하달받은 이상, 그 목표를 무슨 수를 쓰든 달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고, 사회적 ‘영웅’이 될 수 있으니까요.
현실에서야 이래저래 다양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원론적으로는 고객의 수요에 맞춰, 즉 고객이 구매하고자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 기업과는 인센티브 체계가 다릅니다.
사회주의 국가 성립 초기에 이러한 국가 주도의 경제 계획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소련과 북한이 대표적인 케이스였죠. 초기 소련의 경제성장률과 1960년대 전후 복구 시점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경쟁 상대인 동시대의 미국이나 한국과 비슷하거나, 이를 종종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성과를 일하는 시간과 일하는 사람 숫자를 곱한 함수라고 봤을 때, 이 시기는 단순히 노동 투입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감자 생산 X만 톤 달성’ 이런 것들이죠.
태평양 건너에서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1960년대 초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쿠바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사탕수수 생산 X만 톤 달성!’ 이렇게 작물만 달랐을 뿐이죠.
기술 진보 X 노동력 X 자본 = 성과
문제는, 사람은 결국 사람일 뿐 24시간 일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초기에는 남녀 평등 관점에서 그동안 가사에 주로 종사하던 여성들을 일터로 불러냄으로써 노동력 투입을 증대시켰고, 사회주의 사상과 공동체 의식을 통해 일하는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도 일정 부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투입량의 증가만으로는 더이상의 성장이 어려운 순간에 도달하는 순간, 사회주의 국가가 세웠던 계획의 한계 역시 도출됩니다.
경제학에서의 생산 함수를 간단히 요약하면 '기술 진보 X 노동력 X 자본 = 성과'입니다. 이 가운데 노동력만 증가시키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죠. 결국 자본도 늘어나야 하고, 기술 진보도 일어나야 하는데 이 두 가지는 개인에게 자발적 동기부여를 요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을 대체로 ‘돈’이라는 보상으로 해결하고요.
그러나 생산 수단을 국가라는 주체가 독점함으로써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로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돈’을 인센티브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생산 수단을 소유해야만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니까요(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또다른 무형 자산인 ‘사회적 명예’가 중요한 사회로 진화합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시스템과 비슷한 오류는 생각보다 자주 등장합니다. 시장의 변화에 따라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 ‘연간 경영 계획’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작성하느라 시장에 대응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업의 규모가 크면 클 수록 이런 부작용은 더 크게 나타나죠.
서비스를 기획/개발할 때 폭포수 방식(waterfall)이 아니라 애자일(agile) 방식으로의 전환을 외치는 이유,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을 많은 기업들이 도입하고자 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조직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관료제적 부작용을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기업들에서 지나치게 근무 시간에 집착하는 것 역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산업의 특성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일수록 노동 투입보다는 자본 투입, 자본 투입보다는 기술 혁신이 더욱 중요합니다. 시가총액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대형 플랫폼 기업들의 경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중심으로 조직이 짜여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명의 천재 개발자가 백 명의 보통 개발자보다 중요할 수 있는 산업군의 경우, 노동 투입의 증가보다는 탁월한 기술 확보가 더욱 성장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고, 워케이션 등 새로운 업무 양식이 등장하는 변화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농업적 근면성’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일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산업이 계속 고도화될수록 업무 시간을 기준으로 보상을 측정하는 기존의 평가 보상 방식이 무력해진다는 것을, 사회주의 국가들의 기업 운용 사례를 돌아보며 재차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블록체인의 이상과 미래? - ‘사회주의 은행’
100여 년 전 등장한 사회주의 시스템은 국가의 통제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인 지휘 체계를 근본으로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점점 증가하는 복잡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성장 정체 단계에 이릅니다.
관료제 시스템의 폐해를 그대로 겪게 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시장 경제 체제를 일부 도입하는 실험을 단행합니다. 1980년대의 중국과 1990년대의 베트남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였죠.
과거 대기업들이 취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관료제 시스템의 문제점을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구소련 등 국가의 몰락이었다면, 최근 등장한 블록체인 경제 시스템은 사회주의를 디자인한 사람들이 꿈꿨던 이상적 사회주의의 모습과도 일부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끕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비트코인을 시작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블록체인 기반 크립토 생태계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거대 플랫폼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크게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ED)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질서에 대한 반발이자, 작게는 애플과 구글 앱스토어 수수료 수취, 구글과 페이스북의 개인정보를 활용한 광고 매출 확보 등에 대한 반발이기도 합니다. 데이터의 주인은 나인데, 왜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서 권력을 얻고, 글로벌 대기업들이 내 데이터를 활용해서 돈을 버느냐 이런 문제제기인 것이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가진 크립토 생태계는 19세기 자본주의로 인한 빈부격차 폐해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 사회주의와도 일정 부분 기원이 닮아있는 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