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술력에 대한 이중적 시각
국내 언론이 북한의 과학기술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이중적입니다. 여느 때는 북한의 과학기술이 한국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가끔은 북한의 기술력이 한국을 충분히 위협할 수준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번 화에서는 북한의 과학기술, 그중에서도 정보통신기술(ICT)에 주로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나가보려 합니다.
북한 스타트업 맹아론(?)
‘스타트업’은 이제 사람들에게 꽤나 익숙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카카오 메신저로 연락을 하고, 쿠팡으로 물건을 사고, 토스로 송금을 하는 삶이 어느덧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일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죠.
이런 기술 기반 스타트업들은 이제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비단 카카오, 쿠팡, 토스 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스타트업이 각 산업 영역에서 혁신을 추동하는 메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기업 반열에 오른 선도적인 스타트업들의 성공에 자극받아, 많은 청년들이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중이기도 하죠. 최근 금리 인상 여파로 자본 시장이 경색되며 살짝 분위기가 저하되긴 했지만, 이러한 스타트업들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더욱 중요한 성장 동력이 되어갈 것이라는 데 이견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요? 북한에도 스타트업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미사일이나 사이버 공격 등 군사 목적으로 집중 육성했던 특정 기술 영역에서는 한국과 비교해 오히려 앞선 측면도 있다고 하니, 혹시 스타트업이 있을 법도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현재로서는 ‘있을 수도 있지만, 확언할 수는 없다’ 정도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는 건, 북한의 과학기술과 ICT에 관해서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도 과학기술이 중요한 줄 안다
북한의 ICT 관련 역량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북한 정부 입장에서도 경제적, 군사적 목적에서 꾸준히 진흥책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집권기였던 1998년 북한은 ‘국가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 나름의 과학기술 발전 및 정보화 정책을 추진해온 바 있습니다. 뒤이은 김정은 정권에서도 이런 과학기술 중시 기조는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은정첨단기술개발구를 창설했는데, 평양 인근 지역에 IT 첨단 기술 산업 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것이었죠. 이처럼 북한은 국가과학원의 주도로 과학기술을 집중 육성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김정은 정권에 들어서는 'CNC'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을 생산자동화와 정보화에 연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CNC(컴퓨터수치제어, 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는 본래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계의 움직임을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제어하는 프로세스를 의미합니다. 북한에서의 CNC는 기존의 의미를 넘어서, 산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ICT 역량을 활용하는, 사실상 ‘과학기술 기반의 혁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죠.
사실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고, 생산가능인구의 다수가 장기간의 군복무를 해야 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학 분야에서 나일론과 비슷한 합성섬유인 비날론을 개발한 것도 북한이었어요. 북한 정부가 생산성 향상에 대한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보화 교육 측면에서도 ‘전민과학기술인재화’라는 국가목표를 설정하고 ICT 관련 커리큘럼을 교육 과정에 반영하고자 노력하고 있죠. 그 성과는 국제 무대에서 나타납니다. 북한의 주요 고등교육기관인 김일성대와 김책공대에서 출전한 팀들이 ICPC와 같은 국제적인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니까요. 2019년 ICPC 대회의 경우 김책공대가 서울대와 같은 레벨의 실버 등급을 수상하여 여론의 주목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을 보면 사실 북한에도 테크 스타트업이 생겨날 만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적, 기술적 역량은 스타트업을 형성하는 기본 요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실제 북한에도 스타트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조직들이 있습니다. 정보기술사 혹은 기술교류사라고 부르는 이 기관들은 북한의 대표적인 ICT 관련 기관들입니다. 대체로 대학 또는 정부 과학원 산하의 연구소들, 일부 국영 기업의 형태를 띠고 있죠. 이들 기관은 자체적인 스마트폰을 제조하거나, 북한 주민들이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전자상거래 관련 서비스 또는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조직 혹은 조직 내 일부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 본격적인 스타트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들이 더 필요합니다. 실질적으로 이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시장이 안정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단순한 자영업 혹은 인력 아웃소싱 형태의 비즈니스 이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자본을 공급해줄 수 있는 투자자 역시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과 기술만큼 중요한 것: 시장, 자본, 정부의 의지
북한과 같이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 경제 영역이 큰 국가의 경우, 이러한 서비스 시장과 투자자 집단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장애물입니다.
단순 소비재 생필품과 달리 ICT 기반의 서비스는 불특정 다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국가가 수행하거나, 수행해야 하는 역할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빌리티나 결제 등 일부 영역에서 국가 제도와 스타트업의 플랫폼 혁신이 충돌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죠. (한국에서 2020년 있었던 ‘타다 금지법’ 관련 논란이 비근한 사례입니다.)
따라서 장마당 등 시장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국이나 베트남 수준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은 북한에서 본격적인 ICT 서비스를 주민들에게 영리 목적으로 제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하는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이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사업의 주체를 특정 개인으로 명시하기는 무척 어렵죠.
그렇다고 아예 기술 기반 스타트업이 없다고 보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단정적으로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면 2020년대 북한 경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돈주’와 같은 현상을 보면 비공식 경제 영역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주’는 북한에서 시장화가 진전됨에 따라 등장한 경제 계층입니다. 사업을 통해 돈을 번 자본가 계급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물밑에서 장래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줄 주요 주체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북한 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계층이지만, 현실 사회에서 ‘돈주’가 존재하고 있고 각종 사업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벌어들이고 있음이 많은 출처를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돈주’와 같은 비공식 존재들의 활동을 인정한다면, 북한에서도 어느 시점에는 ‘돈주’가 엔젤투자자처럼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고, 국영기업의 허울을 쓴 어느 엔지니어가 이를 바탕으로 나름의 수익 활동을 하는 형태 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정부의 의지입니다. 김정은 정권이 어떤 방향으로 이러한 자생적 서비스 제공자들을 컨트롤할 것이냐, 그저 불안정하게 불법을 눈감아주는 '암묵적 허용'을 유지할 것이냐 혹은 적극적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독려하는 정책을 펼칠 것이냐에 따라 성장 방향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지정학적 변화가 미칠 영향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죠. 미중관계는 더욱 험난한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분석이 잇따릅니다. 이런 지정학적 변화는 북한에게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ICT 영역에는 반도체, 컴퓨터 등 전략 물자로 분류되는 항목들이 많습니다. 1996년 바세나르 협정에 의거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 국가들은 북한을 포함한 위험 국가들에 컴퓨터 및 통신 장비 등의 수출을 강력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통신 장비 등은 물론 민간에서도 쓸 수 있지만, 동시에 군용으로도 전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원유 등 에너지 자원 수입과 마찬가지로, ICT 역량 강화에도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각종 제재 조치로 대외 무역이 제한적인 북한 입장에서는, 한때 미국에 대항해 같이 전쟁을 치른 혈맹인 중국에 많은 경제적 의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중국 입장에서도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합니다. 북한은 건국 이후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자국을 지지해 온 전통적 우방국입니다. 또한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군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부딪치지 않게 해주는 완충국 역할을 해왔죠.
시진핑 연임 전후로 중국의 주요 테크 기업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은 강화되고 있는데요. 중국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면, 북한의 ICT 영역에도 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더 강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북한의 ICT 영역 종사자들에게는 중국의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중국에 더욱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현재의 미중관계 및 남북관계 환경으로 봤을 때 이러한 구도에서 한국의 ICT 기업들 및 스타트업들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당분간은 다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가져가봐야 하겠지만요.
다음 화에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논의들을 바탕으로 과연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시리즈를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 북한의 ICT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 “체제전환기 ICT 스타트업 생태계 연구”(2021) 참조.
사진: Unsplash의Marvin Me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