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로 생각한다!
대학원 본 과정이 시작되었다. 눈에는 불을 켜고, 귀에는 흡음기를 대듯 집중해서 들어보았지만 영어는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에게 각 지방의 사투리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듯,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사투리인지 분간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영어는 잘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3개월간 어학 과정 담임 선생님께 차근차근 영어를 배우고 익혔지만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과제 통과와 동시에, 바로 랭귀지 스쿨 학생에서 대학원생으로 신분이 급격히 변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일부러 천천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실전이었다.
그렇게 귀머거리가 된 심정으로 강의실에 앉아 있었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내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는 사실이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잘 들리지 않는 영어를 만회할 수 있는 '청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감각과 분위기였고, 강의실의 공기와 온도까지 기억하겠다는 생각으로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며 매 강의를 들었었다. 이렇게 온몸의 감각기관을 총동원해서 들었던 강의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워크숍, 튜토리얼, 조별 과제, 개인 과제, 논문, 최종 시험에 이르는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하는 내용이 재미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1학기 때는 학생들 간의 교류를 돕고, 서로의 수준차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조별과제의 비중이 컸다. 1학기 시작부터 바로 유학생활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유학생의 비율이 높았던 우리 과에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로 조가 구성되었고, 어쩌면 그렇게 생김새만큼이나 의견도, 의사소통 방식도, 감정 표현 방식도 모두 다르던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나는 깜짝 놀랄만한 일들을 겪곤 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참 좋았다. 어른들이 정해준 삶의 공식을 따르던, 나만의 가치관이 뚜렷하지 않던 서른 즈음의 나는 그렇게 자유분방하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친구들의 모습에 충격과 감동, 불편함과 경외심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차츰 힘을 모아 성과물을 만들고 함께 발표를 하기 위해 연습하며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 사람을 대하는 태도,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 각 나라별 관용과 포용의 차이를 하나씩 흡수하며 점차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감싸게 되었다.
함께 학업을 하다 보면 정이 들어서 꼭 밥을 같이 먹게 된다. 그러면 나는 졸지에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을 친구들의 주방에서 맛볼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친구의 집에서, 현지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혹은 나의 기숙사 주방에서 음식 파티와 문화 파티가 펼쳐졌고, 나 역시 김치전과 떡볶이, 닭백숙을 만들어 이게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며 허풍을 떨기도 했다.
조별 과제도, 개인 과제도 차츰 하는 방식을 터득하고 하나씩 기한 내에 제출하는 습관을 만들어 차근차근 배운 것을 나만의 성과물로 만들어가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행복했다. 그렇게 친구들과도, '디자인 공부'와도 친해질 때쯤 내가 겪은 새로운 난관은 바로 입이 안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영어를 잘 못해서 자신감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관찰해보니 영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해당 주에 교수님으로부터 배우거나, 읽어야 할 책으로부터 익힌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매 단계마다 말로 설명하고, 토론하고, 나만의 이론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학교 다니던 내내 교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무조건 흡수하고, 외우고, 시험에서도 외운 것을 최대한 많이 써본 적은 있지만 내가 새로운 가설을 세우거나, 이론을 만들거나, 증명하는 것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교수님, 조교와 같은 그룹의 학생들이 만나서 실습을 통해 배운 내용을 소화하는 워크숍이나,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튜토리얼 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늘 받아들이는 역할만 하던 내가 나만의 생각을 이야기한다는 것, 나만의 해석을 남들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낯설게 느껴졌었다. 그때 느낀 것은 내 실력이 기초 단계더라도 꼭 배운 내용을 입 밖으로 내어 설명하고, 거기에 나만의 생각을 첨언할 수 있어야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익혔다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워크숍, 튜토리얼에서 학생들이 포스트잇에 생각을 자유롭게 적고, 그림으로 그려서 벽에 붙이며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내게 잊히지 않는 청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는 '구술시험(Viva)'을 앞두고는 내 모든 역량을 모아서 내가 배운 지식과 내가 정한 논문의 방향을 이야기하며, 말하기에 힘을 쏟았었다. 그렇게 나는 문화 차이, 영어의 벽, 교육 시스템의 차이를 정면으로 느끼고, 돌파하며, 조금씩 나만의 디자인 철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비주얼 씽킹인지 모르고 시작한, 비주얼 씽킹
2학기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에게 스케치북 한 권씩이 주어졌다. 새 스케치북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던 일곱 살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한 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스케치북 한 권에 채우는 것이 그 과목의 개인 과제였다. 2학기부터는 개인별 논문 주제에 대해 서서히 준비하던 시기였기에 다른 친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얀 스케치북에 수업 내용을 어떻게 잘 담을 수 있을까? 이 생각이 비주얼 씽킹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세월이 10년가량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전체 장수가 정해져 있고, 페이지 구성과 각 페이지의 배치, 스케치북 전체의 분위기, 내가 담고 싶은 핵심 내용, 나만의 철학과 생각을 어떤 디자인 요소로 표현할지 생각해보던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꼭 책을 한 권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기분이었다. 쪽수를 생각해서 한 학기를 각 주로 나누고, 다시 개인 과제와 조별 과제를 균등하게 나누고, 마지막에는 논문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매주 특강을 해주시던 교수님들의 모습을 내가 생각하는 간단한 그림으로 그리고, 3시간짜리 강의를 종이 한 장에 담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째깍째깍 흘러가면 그만인 시간을 종이 위에 담는다는 사실이 가슴 떨리게 설레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초등학생 때 상상 속 친구들을 종이 위에 초대해서 크레파스로 그리던 것에서 훌쩍 발전해서, 실체가 있는 강의 내용과 분위기를 나만의 글과 그림으로 종이 위에 담았다.
2학기는 그 스케치북 한 권 때문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1학기 때 받았던 문화 충격, 언어와 학문의 벽으로 인한 놀라움은 2학기 때 강의를 듣고, 요약하고, 그림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던 과정들을 반복하면서 한번 더 '좋아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온전히 영혼을 쏟아부어 완성한 스케치북 과제물은 지금도 내 보물 1호다.
그 보물 1호를 가지고, 10년이 지나서 비주얼 씽킹 강의를 하게 되었다. 10년 전의 그 스케치북이 비록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완벽한 그림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회사로 돌아와서 업무를 할 때에도, 개인 공부를 할 때에도, 강의 준비를 할 때에도, 육아를 할 때에도 '비주얼 씽킹'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점점 그 방법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삼십 년 전 초등학생 시절의 스케치북과 십 년 전 유학생 시절의 스케치북은 내 인생을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